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성용(기업인) (문단 편집) == 이야깃거리 == 약력을 보면 알겠지만, 대기업 회장인 동시에 교육, 정치 분야에도 깊이 몸담은 사람이다. 물론 교육계 인사가 명망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대기업 회장이 교수 출신에 정부에서도 일한 경우는 드물다. [[김광두]] 전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금호로 영입한 장본인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위기에 처하자 [[박성용(기업인)|박성용]] 회장 본인과 자신의 동생이자 [[김광두]] 전 부의장의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선배인 [[박정구]] 회장, [[박삼구]] 회장과 함께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김광두]] 전 부의장의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연구실을 직접 찾아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금호석유화학그룹]]의 감사위원을 맡아 그룹 내에 강력한 구조조정과 불필요한 계열사 정리 등 그룹의 위기극복을 직접 추진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김광두]] 전 부의장은 흔쾌히 수락하여 그룹의 위기극복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함으로써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성공적인 위기극복을 해내었고 이를 지켜본 [[박성용(기업인)|박성용]] 회장과 [[박정구]] 회장, [[박삼구]] 회장이 더 남아줄 것을 요청하여 2011년까지 [[금호아시아나그룹]] 감사위원과 [[금호석유화학그룹]] 감사위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 [[신정아]]가 금호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던 2001년, 그의 '예일대 박사' 학위가 가짜임을 파악해내고 해고시켰다. 본인이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데다가, 예일대 한국 동문회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진작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 *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귀국해서 잠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4학년들을 대상으로 '거시경제학 특강'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첫 강의에서 경제학의 기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학부생들의 실력이 너무나도 형편이 없어서 "너희들 서울대 상대 4학년생 맞냐?" 라고 일갈했다. 심지어 거시경제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에지워스 상자에서 생산가능곡선을 도출하는 방법조차 몰라서 눈만 끔뻑대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정도.[* 에지워스 상자는 미시경제학의 마지막이자 대미인 일반균형에서 공부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거시경제학의 기초라기보다는, 거시경제학을 미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미시경제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숙지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부수업이 그렇듯 교과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인 파레토효율과 일반균형은 날림으로 배웠을 확률이 높다. 지금처럼 고시용 강의가 널리 퍼진 시절도 아니었으니...] 결국 1학기 내내 거시경제학과 경제성장론을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쳐야 했다. 당시 그의 수업을 들었던 사람 중에는 '''[[이준구(교수)|이준구]]''' 교수도 있었다. * 보수적인 재벌가의 맏아들이면 보통 다른 재벌가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하는게 상례인데, 이례적으로 [[미국인]] 여성인 마거릿 클라크 박 여사[*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서 박씨가 되었다.]와 연애결혼을 했다.[* 남편 사후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2013년에 미국에서 별세] 유학 도중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애 끝에 결혼했고, 그래서 슬하의 자녀들인 딸 박미영과 아들 박재영은 [[유라시안]]이다.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은 내내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다가 미국에 갔을 때 손주들을 보고 나서야 며느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재벌가와 달리 금호의 경우 2세, 3세로 이어지지 않고 형제 경영으로 이어진 이유 중에 이 부분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였을 것이다. 박성용은 결혼 후 클라크 여사에게 박인천 회장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한국의 며느리가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해 귀가 닳도록 설명했고 클라크 여사는 자녀 박미영과 박재영을 [[이화여자고등학교]]와 [[구정고등학교]]를 각각 졸업시키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을 만큼 한국식 자녀교육을 고수했다고 한다. 박성용의 사망 후 클라크 여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박미영은 캐나다, 박재영은 미국에서 거주 중이다. 외국인 며느리를 크게 반대했던 박인천 회장은 생전에 클라크 여사가 큰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보고는 늦게나마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참고로 장남 박재영은 홍정욱의 저서 7막7장에 함께 유학하던 친구로 등장한다. 어머니가 미국인이라 영어도 잘하고 호쾌한 성격으로 묘사됐다. >-'''"12년 전 초겨울이었나요. 이른 아침 항공기 밑을 오가며 점검하고 있는데 손님이 한 분 다가오셨죠. 알고 보니 명예회장님이셨어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 손을 잡으시며 '자네의 손이 아시아나를 있게 하네'라고 말씀하셨죠. 제 양손에 낀 기름 묻은 장갑도 개의치 않으셨던 어진 어른이셨는데…."''' >-'''"B767 항공기를 타시면 주무실 때도 뒷분이 불편하실까봐 등받침도 뒤로 젖히시지 않으셨던 명예회장님을 보고 많이 배웠는데….극락에서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박삼구 회장님도 힘내시고요."'''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고정관념으로 보면 대기업의 회장이니, 신발도 좋고 점잖은 걸 신어야 하는데, 그런 형식에 개의치 않았다. 가령, 해외출장을 가게 되어 비서가 따라오면 “뭐 하러 따라와” 하며 혼을 내서 되돌려 보냈다.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치고, 배낭 같은 것 메고, 자기가 수속 밟고 가는 것이다. 대그룹의 회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탈한 사람이었다."''' >----- > 전 부총리 겸 재무부장관 출신이였던 故 [[이승윤(정치인)|이승윤]] 금호그룹 고문의 자서전 "전환의 시대를 넘어" 中. >-'''"나보다 열일곱 살 위인 형님은 늘 내게 아버지 같은 어른이었다. 어린 시절 밥상예절을 형님에게 배웠고, 경영자가 된 뒤에는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자세에 대해 배웠다."''' >----- >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명예 회장과의 인터뷰 中. >-'''"고인은 89년부터 16년간 장애아들에게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였다." ···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항상 정이 많고 소탈하신 모습으로 크고 작은 행사까지 직접 챙겨주시던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 "특히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80년대부터 장애아들이 꼭 필요로 했던 실내시설 지원을 도맡으셨고, 아이들의 졸업 후 진로까지 걱정하셔서 장애인 직업재활센터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 > 박성용 회장의 작고 후 [[유스퀘어]]에서 차려진 분향소에서 [[광주광역시]]의 특수학교인 은혜학교 당시 교장이였던 박순옥 수녀의 회상. 박 명예회장은 은혜학교의 지원을 위해 금호그룹의 경제적 지원은 물론 그룹사와 협력사들의 지원도 물심양면으로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학생들의 통학을 위한 차량 지원은 금호고속을 통해 이끌어냈다. 금호그룹 임직원들의 평가에 의하면 박성용 회장은 상당히 정이 많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평소에도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식사를 하며 소탈하신 분이였다고 회자된다. 아시아나항공의 한 직원은 '''"소탈하다 못해 좀 가난해 보일 정도로 낡은 배낭에 이어폰을 꽂고 미소를 머금으신 채 항공기에 탑승하셔서 회장님에 대한 인상을 바꿔놓으신 멋쟁이 자유인"'''이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또 다른 직원은 신입 사원때 박성용 회장을 몰라보고 "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어디 가세요? 예약은 하셨고요?" 라는 말실수를 하고, 그 할아버지가 회장님인걸 뒤늦게 깨닫고 따라가 사과드렸더니 "어때요? 정감 있어 난 참 좋구만. 조용히 가고 싶어 혼자 나왔으니 알리지 말아요. 할아버지에게 참 친절하구만." 이라고 말 할 정도로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고 회고했을 정도. 당시 여타 기업 내에서 군대식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을 감안하면 가족 친화적인 기업문화를 중시했던 박성용 회장의 철학이 담겨져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상당한 애연가였으나 1987년 금연에 성공하면서 금호그룹을 한국 최초의 금연문화를 구축했다. 폐질환이라는 가족력 때문이다. 박인천 창업주가 젊은 시절 2년간 폐병을 앓은 적이 있었고, 박성용 명예회장과 박정구 회장도 애연가였지만 폐가 좋지 않았으며, 결국 두 형제 모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고는 개인의 권리지만 흡연자를 승진시키지 않을 권리는 나에게 있다"는 박 전 명예회장의 발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금호아시아나]][[분류:1932년 출생]][[분류:2005년 사망]][[분류:순천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일리노이 대학교 출신]][[분류:예일 대학교 대학원 출신]][[분류:밀양 박씨]][[분류:개명한 인물]][[분류:범금호가]][[분류:기업인 자녀]][[분류:금관문화훈장]][[분류:서강대학교 재직]][[분류:폐암으로 죽은 인물]][[분류:국민훈장 무궁화장]][[분류:중앙고등학교 출신]][[분류:국제결혼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