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승동 (문단 편집) == 활동 == 서울대 수학교육과에 79학번으로 입학하여 1983년 졸업과 함께 경복고등학교로 발령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강의 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군대는 교직 생활을 하던 도중에 다녀왔다고 한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EBS에 출연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EBS 강의를 본 학생들은 많지 않았고 박승동의 수업을 보는 학생도 많지 않았다. 왜냐면 당시는 EBS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 기반이 아니라 TV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EBS 편성표를 보면, EBS 방송은 오후 4시부터 유치원 대상 프로그램을 시작, 초등학생, 중학생 강의를 거쳐 다큐멘터리와 성인 대상 영어회화, 프랑스어회화, 일본어회화를 방영했고 고교 수업은 오후 9시경 시작되어 1시간 20분간 이어졌으며, 이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 강의가 이어졌다. 즉 하루에 할당된 EBS 고교 강의는 40분짜리 강의 2편이 전부였으며, 고1,2,3 강의가 돌아가면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당시에는 야간자율학습이 사실상 강제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10시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EBS 고교 강의도 다 끝나고 방통대 강의가 흘러나오는 시작이었다. 대부분 EBS에 관심이 없었고, 설령 EBS를 보는 경우도 야자시간에 학교 텔레비전으로 강제 시청하는 것이었다(사실 시간배정의 목적도 학교에서의 시청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방송 시간이 10시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야간자율학습은 10시에 끝나기 때문에 실제로 시청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이 시간대에 EBS를 틀어주는 학교는 10시 이후까지 강제로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비인권적인 학교임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이른 시간인 7시나 심지어 일부학교는 그 이전까지 등교를 해야하던 시절이므로 당시 10시는 현재 고등학생 기준으로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워낙 방송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이 시절 EBS를 열심히 보는 학생이었다 하더라도 학년에 따라서는 졸업할 때까지 박승동을 한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학생들이 EBS를 보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였다. 1995년 사교육 억제 및 공교육 강화를 내세운 교육부는 EBS 방송 강의를 전면 쇄신했다. 당시 교육부는 'EBS 수능 연계 출제'라는 희대의 카드를 사용했다. 이에 그때까지 EBS를 외면하던 학생들은 전부 EBS 교재를 사들였고, 교육부에서 각 학교에 지침을 내려 학교에서도 선생들이 출판사들로부터 커미션을 챙겨 강의하던 사설 참고서를 던져버리고 EBS 교재로 수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EBS는 사교육 억제라는 취지에 따라 당시 EBS의 메인 강사였던 [[유두선]] 등 당시 학원 강사 출신 인기 강사들을 전부 해임하고 전국 교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강사 모집을 하여 젊고 새로운 강사진을 내세웠다. 박승동은 90년대 초반 EBS에 출연했다가 이후 사설 대형 학원의 유명 강사들이 EBS에 출연함에 따라 박승동은 한동안 EBS에서 볼 수 없었다가, 1995년 사설 학원 강사들이 전부 물러나면서 박승동은 다시 EBS에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 박승동의 명성은 실로 대단해서 공부라고 하면 당연히 자습을 생각하던 지방의 최상위권 학생들도 박승동의 수업이 방영되는 시간에는 집에 와서 TV로 수업을 들었다. 강남의 강사들은 대단하다더라 말은 들었지만 '''가서 들을 수는 없던''' 시절 전국 1타 박승동의 강의를 TV로 접한 지방 학생들의 '''충격'''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때는 EBS에서 강의하는 대부분의 강사들이 학교 교사였다. [[이만기(학원인)|이만기]]도 당시에는 교사였기 때문에 출연하는 때였다.] 지방 뿐만 아니라 서울 학생들도 박승동의 강의로 수학 공부를 하였다. 전율이 일 정도로 쉽고 창의적인 풀이, 교과서와 겸손한 자세를 강조하는 태도 등이 한데 어우러져서 박승동을 가장 이상적인 강사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박승동은 EBS로 유명해진지 불과 1년여만인 1996년 교사직을 그만두고 사교육계로 진출하여 강남대성학원에 입성했다. 이에 대해 당시 공교육 매체인 EBS로 뜨자마자 공교육을 버리고 사교육으로 간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박승동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공교육의 붕괴를 더 이상 지켜보기 싫다'''"고 말했다. 사교육에 진출한지 한참 지난 후에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평준화가 없어져 인재를 키운다는 보람만 있으면 말이죠. 하지만 한반 30명 중 2~3명만 교사 설명을 듣는 지금 교실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사 시절 박승동은 다른 교사들과 달리 서울과학고등학교에서 4년 순환 근무 원칙을 적용받지 않고 장기 재직하고 있었고, 다른 학교로 전근가더라도 과학고 교사들이 그러하듯 한성과학고 등 다른 과학고로 순환 배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90년대부터 서울의 인구를 고려하여 제3의 과학고 설립이 꾸준히 추진되었고, 실제로 [[세종과학고]]가 개교했다. 때문에 박승동이 사교육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서울 시내 과학고와 인근 경기, 인천 지역 과학고들을 돌다가 정년 퇴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박승동 본인의 발언에서도 암시되듯 평준화를 완화하고 특목고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실제로도 특목고가 지속적으로 확대됨은 물론이고 자사고까지 생겨났다. 이런 사정으로 박승동의 이러한 발언들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있다. 어쨌든 당시 [[강남대성학원]]은 서울과학고 교사 박승동을 영입했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종로학원]]에 가려 2인자 위치에 있던 강남대성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실제 대성학원에서도 박승동의 인기가 대단했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90년대말부터 수능이 물수능으로 바뀌면서 엄청나게 쉬워졌고, 만점자가 양산되었다. 교과서와 기본서, 유형서 정도만 풀어도 최상위권 수준의 고득점을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수학보다 사과탐의 영향력이 더 크던 시절이기도 했다. 요즘 흔히 박승동이 90년대 ~ 2000년대에 걸쳐 전국 수학 1타라고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 인강 강사로서 그의 전성기는 생각보다 짧은데, 그가 전국 1타 수학 강사였던 시절은 2005학년도 EBS 수학1 고득점 200제 강의와 메가스터디에 처음 이적해서 녹화한 2005, 2006학년도 강의까지 1년여 정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EBS와 메가스터디를 합쳐서 집계한 결과이다. 무료 EBS를 제외한 유료 인강에서 박승동이 1타였던 시절은 몇 개월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인강 강사들이 대거 이적하던 공백기에 매우 운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박승동의 전성기는 90년대 중반 EBS에 출연했던 시기(1995~1996)와 오프라인 학원이었던 대성학원 시절(1996~2004)이었다. 2000년 손주은이 메가스터디를 만들며 인강이라는 플랫폼이 처음 생겨났고, 박승동이 소속되어 있던 대성학원도 2000년 하반기 '디지털대성'이라는 인강을 시작했으며, 박승동은 인강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대성은 3개월만에 망했다. 당시 디지털대성 대표의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수강생이 천명 밖에 되지 않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디지털대성은 3년만인 2003학년도를 맞아 다시 인강 사업을 시작했고, 수학에는 박승동과, [[서정원(강사)|서정원]]이 대표 강사였다. 하지만 당시 디지털대성은 '상위 10%를 위한 고품격 인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아예 처음부터 중하위권은 외면했고 강사진은 전원 대성학원 내부 강사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디지털대성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이투스]]와 코리아에듀에 밀리며 처참한 점유율을 보였다. 대성학원이 유명 학원이긴 하지만 재종반으로서 강사 연봉이 제한되어 있었고 때문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강사는 EBS 출신 박승동을 제외하면 전무했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강사들은 노량진과 강남의 대형 단과 학원 출신이었다. 이러한 노량진, 강남 유명강사들을 경쟁적으로 영입했던 메가스터디, 이투스 등과는 경쟁이 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박승동이 EBS를 떠난지도 오래되었고 해서 그를 잘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다. 2004년부터 디지털대성은 '대성마이맥'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며, 최상위 10%라는 문구를 지웠지만 학생들은 마이맥이라는 네이밍부터 너무 구리다고 깠다. 게다가 대성마이맥의 너무나 촌스러운 교재 디자인과 조악한 인쇄 품질은 90년대 학력고사 시절 참고서만도 못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04년 4월에 사교육 억제 대책의 일환으로 [[EBS]] 계열 인터넷 강의 사이트인 [[EBSi]]가 만들어졌고, 이 때 박승동이 전격적으로 영입되면서 거의 8년만에 EBS로 복귀하였다. 이 때 수학1 고급형을 맡아 개념 위주의 강의를 했고, 그 해 여름방학에는 수학1 고득점 200제 전국 순회 강연까지 소화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그 해 말에 메가스터디로 이적하면서 1년도 채 안되어 EBS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메가스터디에서 첫 강의를 하던 2005년은 매우 절묘한 시기였는데, 인강이라는 플랫폼이 처음 도입된 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오늘날과 같은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한 새로운 인강 업체들이 마구 생겼다가 망하거나 합종연횡을 하며 변화가 심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0년대말 노량진, 서울역, 강남 등 오프라인 대형학원에서 인기를 얻었던 1타 강사들이 인강이라는 매체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인강 합류를 거부하는 등으로 수학 분야에 격변이 있었던 시기였다. 한편 현재 네임드가 된 [[한석원]], [[삽자루]], [[신승범]], [[심주석]] 등이 인강에 진출하기 시작하던 시기 또한 이 무렵이었는데, 당시 인강은 패스라는 개념이 없었고 수학 강좌 하나에 30~40만원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당한 고액이었던데다 같은 회사의 타 강사 수업을 듣는데도 또 다시 강의를 사야 했다. 때문에 인강 강사들이 인지도를 얻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랬던 시절, 과거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었던 박승동이 잠시나마 1타를 차지했던 것. 사실 EBSi가 론칭하던 시기와 맞물려 교육 기회 균등을 기치로 출범한 [[무료]] 인강 [[티치미]]의 [[한석원]], [[한석만]], [[김찬휘]]의 강의가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고, 오랫만에 EBS로 복귀한 박승동은 90년대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또한 EBSi에 박승동과 함께 남언우가 영입되었는데, 남언우는 90년대부터 종로학원에서 활동하던 강사로 당시 극상위권이 몰려있던 종로학원 학생들에게 큰 인기와 존경을 받던 강사였다.[* 90년대말 본고사가 폐지됨과 동시에 수능이 급 쉬워지면서 대성학원은 당시 웬만한 시중교재보다도 쉽게 내용을 바꾼 반면, 종로학원은 과거 명성에 집착하여 물수능 시절에도 여전히 본고사 난이도의 극악한 난이도를 가진 교재로 강의했었다. 결국 이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대성학원이 종로학원을 추월하게 만들었다.] EBS에서 박승동은 수학I을 강의하였고, 남언우가 수학II와 미분과 적분을 맡으면서 이과를 담당하게 되었다. 문이과 공통과목인 수I의 파이를 가져가려는 전략이었는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수I 강의에서 EBS에 갓 데뷔한 [[심주석]]이 중하위권 쪽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1타를 차지했으며, 이과 수학을 전담한 남언우는 이과생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게 되면서 박승동의 입지가 어정쩡하기도 했다. 결국 2005년 메가스터디에 합류한 뒤의 박승동은 1타를 차지하지 못했고, [[소순영]]에 밀려 2타에 그쳤다. 당시 1타였던 소순영은 서울대 수학교육과 출신이며 서울과학고, 한성과학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90년대말부터 EBS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소순영은 편안한 자세로 친화력 있고 대중적인 강의를 보였다. 그의 풀이와 설명은 매우 쉽게 느껴져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수학적 원리와 핵심을 잡아주어 중하위권에서 상위권에게 이르기까지 큰 인기를 얻었다. 소순영은 박승동과 매우 흡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당시 엘리트 이미지가 강했던 박승동과 달리 강의에서 자기자랑질은 물론이고 일체 현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많은 학생들은 자상한 태도로 항상 어려워보이지 않게 가르치는 그가 이렇게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임을 뒤늦게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2006년 소순영이 당시 인기 강사들이 모여 만든 새로운 인강업체인 [[위너스터디|엑스터디]]로 이적하면서 박승동은 2006년 잠시 메가스터디 1타에 등극했다. 이 시절 박승동이 메가스터디 1타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박장준이 당시 메가스터디 1타였다는 주장도 있다. 메가스터디 수학 1타 계보가 소순영->박장준->신승범으로 이어진다는 것. 다만 박장준에서 신승범으로 1타가 교체되던 2008년경 잠시 박승동이 1타였던 적이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2006학년도 기준 당시 상위권 수험생 사이트였던 오르비 기준으로 박승동은 소순영, 한석원과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던 상위권 대상 인기 강사 중 한명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수험 사이트에서의 인기와 실제 강사들의 매출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2006년 박승동은 수학 인강 시장에서 마이너 인강으로 자리를 옮긴 소순영, 티치미의 한석원 등과 삼파전을 이루었다. 이것이 그의 짧은 전성기였다. 하지만 소순영의 이탈 이후 메가스터디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이시절 급성장하던 이투스, 비타에듀, 엑스터디, 티치미 등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나중에 [[신승범]]을 영입한 후에 극복된다. 한편 당시 마이너인강이었던 [[비타에듀]]의 [[삽자루]]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2007년 삽자루가 수학 1타로 등극했다. 마이너인강이었던 비타에듀는 순식간에 3대 인강으로 떠올랐고, 2009년쯤에는 메가스터디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삽자루의 등극은 소순영, 한석현, 박장준, 한상범, 박승동 등 1세대 인강 강사들이 도태되고 2세대 인강 강사로 교체되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박승동이 2005년 짧은 전성기 후에 곧바로 내리막을 타게 된 것은 당시 입시트렌드 변화 탓도 크다. 박승동이 실질적 전성기에 있던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에 치러진 수능 중 90년대 말 수능부터 2001학년도 수능까지는 수능이 쉽게 출제되었다. 이때는 예체능을 제외한 대다수의 과목이 수능 필수였기 때문에 난도를 높이기 곤란하였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책기조가 쉬운 수능이었기 때문이다.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박승동은 사실 원래 EBS 시절부터 상위권이 아니라 쉬운 수능 트렌드에 맞게 중상위권을 타겟으로 하던 강의를 펼쳤다. 대성마이맥 시절에도 최상위권 포지션은 서정원이 가져갔고, 박승동은 중상위권을 공략했었다. 하지만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대격변이 있었다. 수능은 2005학년도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2004학년도 수능까지는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통합되어 있어서 문이과 모두 물화생지1 수준의 공통과학 및 윤리+한국지리+한국사+일반사회가 포함된 공통사회를 응시해야 했다.[* 대신 문과는 사회탐구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세계사/세계지리 택1, 이과는 과학탐구에서 물화생지2 택1이었다.] 하지만 2005학년도 수능부터는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분리되는 것도 모자라 각각의 과목을 모두 선택하게 되면서 이과는 국영수 + 과탐 2~3과목, 문과는 국영수 + 사탐 2~3과목 체제로 바뀌었고 이후 사과탐 2과목 체제가 정착되며 2021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리영역 또한 2004학년도까지는 문과/이과/예체능으로 나뉘어서 공통수학은 무조건 모두 응시하고 문과가 수학1, 이과가 수학1+2를 응시하도록 했지만 2005학년도부터는 가형 수학1+2+선택과목, 나형 수학1로 개편되면서 수리영역의 전반적인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게 되었다. 때문에 "'''모든 수능 수학 문제는 세 줄 안에 풀리도록 출제된다'''"는 '''"세 줄 풀이론"'''을 강조했던 박승동의 강의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예전만큼의 명성을 찾지는 못했지만, 박승동 역시 이런 트렌드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여 2004년 여름방학 당시의 EBS 고득점 200제 강의에서 온갖 고난도와 지저분한 문제를 세 줄 풀이론으로 해결하면서 박승동의 대표 강의이자 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강의로 남아있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잡 취급받던 [[신승범]]이 2007년 메가스터디로 이적해 오고 나서 2008년 곧바로 메가스터디 1타 자리도 신승범에게 내주게 되었다. 사실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잡이었던 신승범이 메가스터디로 이적한 후 전국 1타가 된 것은 시사점이 많은데, 일단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잡이었던 신승범이 메가스터디로 이적해오자마자 1타를 차지할 정도로 박승동의 지지층이 허약했다는 점, 그리고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였던 신승범이 순식간에 전국 1타가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케팅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회사인 메가스터디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박승동이 그동안 고전했었고, 때문에 메가스터디 자체가 그시절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는 점을 보면 인강 강사로서 박승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형 인강업체의 후광과 마케팅빨은 당시에도 엄청났는데, 신승범의 사례도 그렇고, 과거 박승동을 압살하던 소순영이 메가스터디에서 엑스터디로 옮긴 후 엑스터디와 함께 몰락해 버린 사례도 그렇다. 중위권 포지션을 삽자루와 심주석, 그리고 얼마 후에 나타난 정승제 등이 완전히 먹어버림에 따라 박승동은 자연스레 최상위권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하지만 상위권 대상 강의쪽에서는 신승범과 한석원이 큰 인기를 얻었다. 게다가 2000년대말 당시 수능 수학이 급 어려워지면서 [[강호길]], [[이창무]], [[남휘종]] 등 극상위권을 노린 강사들이 여럿 뜨면서 박승동은 잊히게 되었다. 그의 전성기를 경험하지 않았던 학생 생각에는 '유명한 수학 강사는 많은데 왜 박승동만 수학의 신, 전설 이런 대단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거지?' 또는 '메가스터디 설립에 공을 세운 다른 강사도 많은데 손주은은 왜 중간에 영입한 박승동에게 부사장 자리를 준 거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EBS 시절 박승동은 인기 있는 수학 강사 정도가 아니라 TV 앞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강사였다. 대성학원 시절엔 학생들이 강남 대성학원에 등록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오랜 기간의 명성이 박승동을 학원 강사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박승동이 단지 강의력만으로 메가스터디 2인자 자리에 오른 것만은 아니다. 메가스터디에는 박승동보다도 훨씬 많은 매출을 거둔 강사들이 많이 존재해 왔다. 초창기 메가스터디는 타사와의 치열한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때문에 강사들에게 연봉을 지급할 자금도 부족하게 되어 주식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메가스터디 초기 대표강사였던 박승동은 메가스터디 지분을 상당히 보유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인강을 접할 수 없게 된 오늘날 오히려 그의 강의가 실제 이상으로 신격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90년대 당시 박승동이 유명했던 이유는 EBS의 유일한 수학 강사였기에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 당시 EBS는 지금과 같은 인강이 아니라 TV 채널이었다. TV 채널로서 시간대 별로 쪼개서 방송해야 했기에 강좌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고, 과목별 강사는 한두명 밖에 없었다. 게다가 박승동의 강의는 교과서를 강조했기에 해설 풀이와 별반 차이가 없고 매우 단순하여 굳이 그의 EBS를 볼 필요 없이 독학하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로봇처럼 딱딱한 말투 때문에 무척 졸리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강의를 보는 학생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는 지금보다 수능이 훨씬 쉬웠고 문제도 매우 평이했기 때문에 굳이 EBS를 보지 않는 학생도 많았고, 문제가 너무 쉬웠기에 박승동의 강의도 사실 별것이 없었다.[* 당시는 고등학교 3년 과정이 모두 수능에 포함되었을 뿐만아니라 문과도 사탐 전과목은 물론, 물리1, 화학1, 생물1, 지구과학1까지 필수로 수능을 봐야했던 시절이다. 시험 범위가 미칠듯 광범위했던 대신에 문제는 매우 쉬웠다. 수학의 경우에도 문제가 매우 평이했다. 이후 수능 과목이 대폭 축소되면서 변별력을 위해 난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쉬운 문제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박승동이라 해도 강의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가 항상 교과서를 강조하고 세줄 풀이를 슬로건을 삼았던 것도 이같은 시대적 배경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박승동의 수학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 간에 그같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줄 만한 문제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 게다가 박승동의 강의는 매우 불친절했다. 항상 기본을 강조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학생들이 이미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을 하지 않았다.... 혹은 개념 설명에서는 또 너무 기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수학에 엄밀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직관적인 설명이나 풀이를 하지 않는 편이기에 해설지 풀이 이외의 인사이트도 그다지 없는 편이어서 굳이 강의를 들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도 많았다. 인강 시대에 들어서 그나마 매우 유해진 것이고 EBS 시절에는 정말 강의가 딱딱했다고. 아마도 그의 풀이가 명성을 떨친 것은 주로 고난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강남대성학원 시절인 듯 하고, EBS 시절에는 당시 수능 정책이나 EBS 정책으로나 그다지 차별화된 강의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늘날 박승동이 상위권 수학을 가르친 것으로 많이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항상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박승동은 가장 큰 파이인 중위권 쪽을 공략하기 위해 90년대 EBS시절부터 많은 공을 들였지만 이쪽에서 경쟁력이 별로 없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상위권 대상 강의로 포지셔닝했으나 이쪽에서도 한석원, 신승범 등에 밀렸고, 극상위권 대상 강의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최상위권 수준에 맞춰 강의한 강호길, 이창무 등이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사실 박승동은 인강이 없고 EBS가 TV로 방영되던 시절에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많은 학생들이 보았지, 그가 실제로 인강에 진출하고 나서는 그의 강의는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EBS TV 시절에도 지방 학생들은 많이 보았는지 몰라도 서울에서는 물론 챙겨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의 전성기였던 EBS TV 시절에는 강의가 딱딱하고 불친절했고, 인강으로 진출한 후에야 그나마 타 강사들과 경쟁하느라 설명이나 풀이가 풍부해졌고 강의도 매우 학생 친화적으로 바뀌었고, 아울려 중하위권에 인기가 많았던 삽자루와 차별화를 하다보니 어쩔수없이 상위권 타겟으로 표지셔닝하게 되고 그렇게 고난이도 문제 위주로 해설하다 보니 은둔의 고수 같은 이미지가 나중에 형성되게 된 것. EBS 시절에는 정말 불친절하고 딱딱했다. 게다가 비음과 쇳소리가 절묘하게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는 특유의 억양과 함께 "엑스" 등을 강조할 때는 가래 끓는 발성이 쇳소리에 더해지며 청각적으로 그의 수업을 듣기가 상당히 거북했다는 평도 있었다. 1년 강의 내내 그의 웃는 얼굴을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수능 수학이 워낙에 어려워져서 교과서 기반의 실전 개념, 수험생들이 따라하기 쉬운 다양한 방식의 고난도 문풀 강의 스타일의 수학 강사가 인기를 얻자[* 대표적으로 [[양승진(강사)|양승진]], [[배성민]] 등이 있다.] 이런 스타일의 원류인 박승동이 재평가 받고 있다. 2020년에는 개념 강좌인 지피지기와 문제풀이 강좌인 백전백승을 촬영했다. Q&A게시판에서는 지피지기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낸 과제를 점검해주고 질문을 받아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21년 3월 메가스터디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났으며, 2021년 12월 6일을 끝으로 메가스터디와의 계약을 종료하였다. 2021년 압구정 개념상상학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