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연(조선귀화인) (문단 편집) == 왜 돌아가지 않았나? == 당시 [[네덜란드]] 기록을 추적한 결과,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 호의 간부급 선원이었다.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측 기록이 있는데,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대위]] or 과장을 의미) 정도로 추정된다. 후일의 행보로 봐서 [[무장(직별)#무장(병기)장|무장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추측대로 [[해적]]에 가까웠던 셈이다. 고향이 현대에도 4,000명 정도만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상경한 뒤 동인도회사에 입사해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초반의 청년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선원은 대표적인 막장 인생 중 하나였고,[*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으로 접했다면 항해가 낭만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물은 변질이 쉽기 때문에 물 대신 실은 원액 수준의 독주로 목을 축이며 소금친 고무타이어 같은 [[염장고기]]와 돌덩이 같은 [[건빵#해군|쉽비스킷]]을 씹어먹어야 했고, [[괴혈병]]과 [[각기병]]은 기본 소양이었다. 그러다보니 불만을 막기 위해 구타도 심했다. 19세기 [[미국]] [[포경선]]에서 일하다 보트를 타고 도망친 선원들이 [[조선]]에 표착했다가 [[베이징]]을 통해 송환된 적[[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c6731&logNo=221208706046&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이 있는데, 그들은 "[[한국인|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사람 대접을 해줬다"고 증언할 정도로, 근대까지 선상업무는 매우 고된 일이었다. 사실 현대에도 선원은 상당히 고된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 여느 노동집약 산업과 마찬가지로 가끔 뉴스에 나오는 한국 국적 원양 어선에서 생기는 사고들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개도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 분야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그 중에서도 극동 원양항해까지 다닐 정도로 빡센 곳이었다. 선상의 위생과 안전이 많이 발달해 웬만해선 안전하게 돌아오는 현대에도 원양항해는 매우 힘든 직업이라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데, 그 당시 원양항해는 살아 돌아올 확률보다 죽어서 시체도 못 찾을 확률이 훨씬 컸다. 동인도 회사 출신 선원 중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덜란드인]]은 1/3밖에 안 되며, 그나마도 평균 수명이 '''40세'''였다. 마이크 대쉬의 '미친 항해'에 의하면,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네덜란드]]에서 가장 멀리 항해하는 회사이기에 생환율도 극도로 낮아서, 기록이 나쁜 사람들이나 범죄자 출신도 자주 뽑아 썼다. 안 그러면 선원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인도 회사 선원 출신이라고 하면 뭐하고 살았길래 거기까지 갔냐며 다른 뱃사람들조차 채용을 꺼렸다고 한다. 하물며 정규 상선도 아니고 타국에서는 그냥 흉악범 취급인 [[사략선]]의 간부라면 안정된 직업이라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헤어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의 선원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던 [[포르투갈]] 해군에 잡혀서 전부 [[마카오]]로 끌려가 교수형 당했다.] 당시 [[조선]]은 박연이든 하멜이든 일단 서양인이면 서양식 무기 기술을 얻어내기 위해 무기 관련 직책을 맡기려 했다. 박연은 여기에 굉장히 해박했으며, [[사략선]]에서도 무기나 화포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직책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조정에서도 계속해서 중용했다.[*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한족]]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삼는 동시에 병장기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이 때 조선에 [[플린트락]]이 전래되었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제작에 필요한 부싯돌이 조선에선 희귀해서 양산되지는 못했다.] 또한 박연은 [[네덜란드]] 본국에서 입지가 없었던 인물이며, 먹고 살기 위해 개막장 취급받는 사략선에 몸담아야 할 정도로 거친 생활을 보냈다. 이처럼 조선 귀화 전에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시골]] [[흙수저]]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하다가 바다로 떠밀려버리고 말았고, 겨우 [[조선|낯선 곳]]에 도착하니 거기선 나름대로 가진 기술을 인정해줘서 [[네덜란드|고향]]에선 꿈도 못 꿀 벼슬에 후한 대접까지 내려주니[* 현대로 치면 사령부 직할대 특임대장 / 국방부 육본 정책과장(중령급) 정도로 특채된 셈이고, 대략 5급 공무원 정도 되는 위치다. 조선 기준으로나 현대 기준으로나 낮은 벼슬은 절대 아니다.] 눌러살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하멜은 300굴덴이나 하는 집을 살 수 있는 부유한 건축가 집안 출신이고, 시장(mayor)의 대자(대부-대자 관계)에, 사략이었던 박연과 달리 정식 선원이었다. 그러니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 남기보다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았다. 게다가 하멜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 측의 기록에서는 하멜도 무기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하멜은 선원시절 회계 담당이었으므로, 총기를 다루는 법 정도는 알아도 제작하는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밝혔다.] 무기 쪽은 아는 바가 없었고, 조선에서도 원하는 기술을 얻을 수 없으니 하멜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부려먹히며 '인질'처럼 살아가던 하멜은 본국이 그리워서 결국 조선을 떠나 귀환한 것이다. 이래저래 하멜과 벨테브레이는 처지가 완전히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하멜의 기록을 살펴보면 벨테브레이는 최소 73세까지는 생존해 있었는데, 21세기 기준으로도 단명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물론 70대 후반 이상의 연령대까지 산 사람에 비하면 장수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는 편이긴 하다.] 17세기 기준으로는 대단히 장수한 삶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위험한 원양 사략선 선원 생활을 계속했다면, 운 좋게 전사나 사고사를 피하더라도 고되고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인한 질병이나 건강 악화 등으로 인해 70대까지 장수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을 것이다. 반면 조선에 정착하게 되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신분에서 벗어나 나름 요직에 등용되고 결혼도 하는 등 큰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니, 조선에 정착한 것은 박연 본인에게도 상당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역만리에서 몇 남지 않은 동료를 잃고 영영 고향을 볼 수 없게 된 그리움은 컸던 모양인지,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인조에게 일본으로 갈 기회를 여러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조선 입장에서 훈련도감의 핵심인물이자 조선의 군사정보에 대해 깊숙히 관여하게 된 사람인 만큼, 그 시점에서는 마음대로 돌려보내기는 매우 아까웠을 것이다. 현대에도 국방부 쪽에서 근무하는 외국인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계속 호소를 하거나 탈출 시도라도 했다간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즉 박연이 네덜란드로 가지 않은 것은, 정착 자체는 자의로 했을 수 있겠지만, 이후 조선의 여건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