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용만(1924) (문단 편집) == 생애 == 1924년 [[경상북도]] [[영주시|영주군]] 풍기면(현 [[영주시]] 풍기읍) 백신리[[https://news.joins.com/article/3334624|#]]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은식(朴殷植)의 4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영주풍기초등학교와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갔으며 1944년 일본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학과를 중퇴하고, 이듬해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 편입하여 1949년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재학 중 [[이철승]]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여 공동의장의 한사람이 되어 [[우익]] 반공·반탁 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청와대|경무대]]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박용만(1881)|우성 박용만]]과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자기를 보면서, 젊을 때를 생각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자유당]]에 몸담았다가 [[이기붕]] 등 주류파의 독단적 당 운영에 반발하여 탈당하였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때는 우익 정치인이면서도 의외로 [[사회대중당]]에 몸담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자 야당인 [[국민의당(1963년)|국민의 당]],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속하였다. 이후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주군-[[봉화군]]-[[영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권성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지 7번째만에 당선되어 화제가 되었다. 당선 이후 신민당 중앙위부의장, 통일문제특위위원장, 당내분수습10인위원회 주류측 대표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창근]]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유신체제 말기인 1979년에는 신민당의 YH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정치규제에 묶였다가 1983년 해금되었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 발기인이 되어 [[신한민주당]] 창당에 합류하였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민주당]] 후보로 지역구를 옮겨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세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신한민주당]]을 탈당한 뒤 [[통일민주당]] 상임위원, 지도위원을 역임하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당시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간에 8인 개헌협상이 열렸을 때는 민주당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뒤 [[여소야대]]의 총선 결과에 따라 야당에게도 국회직이 배정됨에 따라 그도 야당 사상 최초로 국회행정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통일민주당]](제13대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에 있었다가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소속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도 민주자유당 당적을 유지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뒤 정계를 은퇴하였고 자유민주민족회의를 조직하여 상임공동의장이 되었다. 이 당시 그는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단독 정부로 보고, 미국에 의한 분단 주장을 반박하고, [[윤치영]] 등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96년 10월 성묘 도중 조카로부터 "[[패륜|정치 활동을 하느라 문중 일에 소홀하였다.]]"라는 이유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0500209138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05&officeId=00020&pageNo=38&printNo=23329&publishType=00010|흉기에 찔렸다]]. 이로 인해 치료를 받다가 결국 그 달에 별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