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은식 (문단 편집) == 생애 == 1859년(철종 10) 9월 30일 [[황해도]] [[황주목]] 주남방(현 [[황해북도]] [[황주군]])에서 박용호(朴用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몰락한 상태로 지냈으나 할아버지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아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0살 때 부친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1885년 향시(鄕試)에 급제했다. 1888년부터 [[참봉]]을 지냈고 1898년 위암 [[장지연]]이 속한 <황성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이 때를 계기로 계몽 운동에 참여하여 만민 공동회, [[독립협회]] 등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대한제국의 자주개혁에 관심을 가지던 지식인이었지만 결국엔 완전한 항일운동가가 되었는데, 을미사변으로 일제에 반감을 가지게 된 게 컸고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1902년[* 일본은 을사조약 전에도 이미 러일전쟁 준비하던 시기(보통 1902년 영일동맹 때부터로 본다. 가쓰라-태프트 밀약때로 보기도 한다.)부터 조선의 몇몇 지역을 거의 일본땅처럼 행정과 개발을 멋대로 하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작은 농촌지역이던 한밭 지역([[대전]])을 큰 영토이자 조선 남부의 허브로 바꾸려고 주변 충청도의 연기군을 포함한 여러 지역 땅을 엄청나게 빼앗아서 대전에 합병하며 큰 도시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을사조약 전에 한창 러일전쟁을 하던 무렵이다. 당시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이미 대한제국의 독립된 정부로의 중요한 권리 상당수가 넘어갔던 시절이다.(을사조약은 제2차 한일협약이다.) 사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은 형식적인 시점이고 실질적 식민지 시대는 3년 이상 더 오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 개혁당에 가입하며 지식인 포지션을 벗어나 완전한 항일 독립운동가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08년 서우학회의 후신인 서북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당시 서북 지역은 [[개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박은식도 [[기독교]]계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에 양명학의 '양지(良知)'라는 개념을 기독교의 '성령'과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고 결국 박은식의 양지론은 양명학의 기반하에서 기독교 '성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신으로의 개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9년 3월, 〈서북학회 월보〉에 보수적인 [[유교]]와 유림 사상을 질타하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해 [[을사조약]]을 막아내지 못한 보수 유림들을 질타하는 기고문을 내었고, [[중국]]의 양명학을 중시하여 이를 필두로 한 '대동교'를 창시하여 종교 부장을 지냈다.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을 통해 유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 유교정신이 전적으로 국왕에게 치중되어 있으며, 백성들에게 보급하여 가르칠 정신이 부족하다. 따라서 백성들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맹자의 사상을 도입해야 한다. >2. 개혁에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유학자가 오기만 기다리는 안이한 태도 때문에 불교나 기독교처럼 쉽게 전파되지 못했다. >3. 간이직절(簡易直切)을[* 간단하며 즉석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 천시하고 지리한만(支離汗慢)한[* 지리멸렬하고 느림.] 학습만을 추구한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교육 활동을 포기하고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구국 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1912년 [[상하이시|상하이]]로 이동하여 박달 학원을 세우고 상하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에는 [[이상설]], [[신규식]]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감독이 되었고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구국단'을 결성하여 독립 운동에 기여했으며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게 되었다가 1919년 상하이로 돌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896년 독립협회가 발간한 독립신문과 당연히 별개의 신문이지만 신문 이름은 거기서 따 온 게 맞다.]의 사장을 맡았다. || [[파일:Rhee_Syngman_and_Yi_Donghwi.jpg]] || || 1920년 12월 28일 [[이승만]] 임시 대통령 환영식. 오른쪽 세번째가 박은식. || '[[노인]] 동맹단'도 조직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우규]]가 있다. 상술된대로 당시의 노인 개념은 40대 후반부터여서 한국나이 46살부터 회원으로 받았고, 50대가 주활동층이고, 60대가 간부층이었다. 물론 강우규는 동맹단 지도자 박은식보다도 나이가 위였기에 60대에 가입하여서 노인동맹단 내에서도 어른이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탄핵]]되자 후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제]]가 대통령이 의정원의 동의없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가 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 이는 도산 [[안창호]]가 임시정부 초기부터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단, [[김구]]와 [[이승만]]이 이를 완전히 묵살했다.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귀찮게 굴지말고 닥치라는 수준(실제 편지에 "입을 다무시오"라고 썼다)의 공격적인 편지를 써 보낸적도 있다.]하였고 이후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정한 후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사임한 이후 그 해 11월 병고(病苦)와 노환[* 사임전에도 건강이 안 좋았다. 대통령직을 수락한 것도 본인의 소신대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직을 그만두기 위함이었다.]을 앓게 된 그는 독립을 위한 민족의 [[통일]]을 주창하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순국 후에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3년 [[노백린]], [[신규식]] 등과 함께 [[국내]] 운구가 결정되어 중국에서 유해가 봉환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