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이천 (문단 편집) === 유소년 시절 === 초등학교 시절 처음에는 육상 선수로 활약하여 서울시 200m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능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계속 축구부에 들어가지 않았던 박이천은 중학교 3학년이던 11월,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당시 [[영도중학교]] 축구부가 단 11명밖에 선수가 없어서 결국 1명이 빠지게 되어 일반 선수 중에서 반드시 1명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닥쳐 박이천이 뽑히게 된다. 당시 윤재봉 감독은 영도중과 영등포공고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장학금을 조건으로 제시하며 박이천을 달랜 끝에 영등포공고 축구부에 박이천을 입단시키게 된다. 당시 영등포공고는 박이천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축구경력이 없던 [[이회택]]까지 진흙 속에서 발굴해낸다.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마치 고교축구를 호령할 것만 같았으나 이회택이 너무 대단한 활약을 한 나머지 부정선수라는 것이 걸려 영등포공고에서 동북고로 스카우트당하게 된다. 박이천이 2학년이 되자 영등포공고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져 해체설까지 나돌았다. 박이천은 광주상고로 잠시 전학을 가나 이회택의 추천으로 동북고에 들어가게 된다. 2학년에서 다시 1학년으로 동북고에 입학하게 된 박이천은 이회택과 마찬가지로 박병석 감독으로부터 기본기를 세밀하게 배우게 된다. 2학년부터 어느 정도 주전이 되었으나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으나, 3학년부터 전국대회를 휩쓸게 된다. 이회택 시절 동북고는 절반 정도를 우승했으나 박이천의 동북고는 11개 대회에서 9개 우승을 차지하며 박이천은 30골 정도 넣은 것 같다고 회상한다.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67년 청소년 대표에도 뽑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