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인호(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동학 농민 혁명]] === 박인호는 동학을 창시한 창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1893년 2월 소두(疏頭) 박광호, 제소(製疏) 손천민, 서사(書寫) 남홍원, 봉소(奉疏) [[손병희]], 김연국, 박덕칠 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최제우를 신원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893년 보은집회 때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덕의포의 관할 교인들을 이끌고 참가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박인호는 제2차 봉기 때 덕산의 대접주로서 그해 10월 1일에 참가했다. 그는 예포 대접주 박덕칠 등과 연합해 해미, 덕산, 예산, 온양, 당진, 홍성 등지에서 관군, 일본군, 그리고 양반들이 동학군 진압을 위해 일으킨 민보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0월 27일 당진군 면쳔면 승전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400명, 관군 500명, 민보군 수천 명과 전투를 벌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 말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박인호는 적의 추적을 피해 각지를 유랑해야 했다. 그는 오리정 주막의 교인 김월화의 도움으로 주변 금오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다가 칠갑산 느티정에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했다. 3년이 지나 1897년, 그는 김명배, 김의형, 김주동과 함께 [[최시형]]을 찾아갔고 이듬해엔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손병희를 차기 교주로 받들었다. 그해 4월 최시형이 체포되자 그는 최시형을 구하기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결국 최시형은 그해(1898) 음력 6월 2일(양력 7월 20일) 처형되었다. 박인호는 최시형의 유해를 수습해 안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