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인호(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독립운동 지원 === 박인호는 출옥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밀리에 후원했다. 그는 상하이와 베이징에 세워진 전교실을 통해 임시정부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상해와 북경의 천도교 전교실에 제공된 자금은 상해와 북경에서 활동하던 [[최동오(독립운동가)|최동오]]와 신숙을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과 그 개혁을 위하여 활용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1921년 9월 태평양 회의의 개최와 관련해 임시정부로부터 모종의 활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았다는 혐의를 적용해 대종사장인 [[정광조]], 현기관장인 오상준, 경성대교구장인 [[장효근]], 천도교청년회장인 정도준과 함께 체포했다가 며칠만에 훈방시켰다. 한편 1921년 12월에는 동학의 지원을 받는 학교였던 [[보성전문]]을 법인화해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보성전문학교#s-4|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22년 1월 18일 박인호는 [[손병희]]로부터 교주 직임을 물려받았다. 그해 5월 손병희가 사망하고 천도교가 구파, 신파로 분리되자 그는 천도교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박인호는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 하며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주장했고, 1925년 중반 천도교가 중앙총리원, 교인대회, 통일기성회로 분열되자 "이러한 큰 도에 적은 일을 힘쓰지 말고 믿음으로 통일하고 규모로 일치하라는 신성의 가르침을 따라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이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는 윤고문(輪告文)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5년 말 천도교의 중앙총리원을 장악한 [[최린]] 등이 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와 영합하자, 박인호는 이에 맞서기 위해 1925년 12월 [[권동진]], [[오세창]] 등 통일기성회, 오영창이 이끄는 교인대회와 연합해 천도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1월 중앙위원회의 명칭을 중앙총리회로 변경했다. 이후 그는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로서 최린 등이 이끄는 신파와 맞섰다. 1926년 3월, 박인호는 구파의 원로인 [[이종린]], 권동진과 천도교청년동맹의 간부인 박래홍, 백래원 등과 함께 [[6.10 만세 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사회주의 세력과 제휴하기로 하고 제2차 조선공산당의 당수이지만 천도교 교인이기도 한 강달영과 연계해 민족유일당 결성을 준비했다. 1926년 4월, 박인호가 이끄는 천도교 구파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청년전위단체로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6년 5월 10일 천도교청년동맹원인 [[박내원]]은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회장인 권오설과 함께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박내원이 구파의 원로인 권동진과 박인호의 양자 [[박내홍]]에게 계획을 설명해 마침내 박인호에게 전달되었다. 박인호는 6·10만세운동 추진을 승인하고, 자신의 양자이자 천도교청년동맹의 대표인 박래홍으로 하여금 천도교청년동맹원들을 참여시키게 했다. 그러나 거사 4일 전 계획이 발각되어 박내원, 손재기, 김덕연, 최덕현 등이 체포되었다. 박인호는 6.10 만세 운동의 추진을 후원했지만 사건 관계자들이 함구한 덕분에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1927년 [[신간회]]가 출범했을 때, 천도교 구파의 원로들이 대거 참여했다. 박인호가 이를 지시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신간회 내에 천도교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박인호가 별도로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천도교 구파는 신간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로는 민족운동을 중단하고 종교활동에 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