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재호 (문단 편집) == 생애 == [[1959년]] [[2월 13일]],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 [[동래구]] [[연산동(부산)|연산동]](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부산)|연산동]])에서 태어났다. 부산연산초등학교, 부산동해중학교, [[부산동성고등학교]][* [[신원식]] 국방장관과 동창이다.]를 거쳐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중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하였다. 군 제대 후 다시 [[부산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 졸업하였고,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신한민주당]] [[서석재]] [[국회의원]]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민주쟁취 선거혁명추진 부산학생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비서실]] 인사재무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김영삼]] 대통령 퇴임 후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1999년 귀국한 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북구·강서구 을|부산 북·강서 을]] 선거구 출마를 선언한 [[노무현]] 후보의 선거캠프에 합류하면서 [[3당 합당]] 후 9년 만에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적하였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에는 노무현 후보의 조직 특별보좌역으로 활약한다. 2003년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반년만에 사임하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남구 을(부산)|부산 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무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국민체육진흥공단]] 상임감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2005년 이사장에 임명되어 2008년까지 재임하였다. 본인도 이른바 지방대학 나온 놈이 매출 5조짜리 공단 이사장을 하면서 나름 잘 운영한 것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 2008년 총선에는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무소속 [[김무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이재정(1944)|이재정]], [[천호선]] 등과 [[국민참여당]] 창당을 주도했으나 [[통합진보당]]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2012년 총선에선 다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서용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5년 [[부인]]이 별세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48.11%를 득표해 43.45% 득표에 그친 현역 의원 새누리당 서용교 후보에 설욕하면서 3전 4기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박재호 의원과 2차례 선거에서 맞붙어 1승 1패의 전적을 주고 받았던 서용교 후보는 2018년 7월 14일에 지병인 [[백혈병]]이 악화되어 만 5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으로서 신규아파트 이주와 오륙도 관광지화로 교통대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용호동 지역에 [[오륙도선]] 트램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의 단수 공천을 받아 출마가 확정되었으며 [[미래통합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도 [[광명시 을]]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온 [[이언주]] 의원과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개표 후 90%선까지도 이언주 후보에게 뒤처질 정도의 접전을 치른 끝에 50.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8.74%의 이언주 후보를 득표율 1.76%, 득표 수 1,430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언주는 출생만 [[부산시|부산]]이지, 실제로 부산에 기반이 없어서 심지어 명함에도 사무실 전화번호가 서울 지역번호인 02를 써놔 말이 많았는데 어찌보면 본인 직통번호 까고 매주 주말마다 지역구 돌아다닌 박재호 입장에선 굴욕일지도.. 그래도 덕분에 90년대 이후 동부산에서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민주당계 국회의원이 되었다. 2022년 6월 7일부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에 선임되었는데, 후술되어있듯 지난 대선 기간 [[골프]] 라운딩 논란이 있어서였는지 당시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선 다소 잡음이 일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