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구 (문단 편집) == 생애 ==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창립한 [[박인천]] 전 회장의 5남 3녀 중 [[차남|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5회),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대학 졸업 직후 [[금호타이어|삼양타이어]]에 입사했다가 [[금호고속|광주여객]] 영업과장으로 재직하여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입사 12년만인 1972년에 광주고속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하였다. 1981년 말에는 [[오일 쇼크]]로 인하여 타이어 업계 전체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할 때 한 해 적자가 50억원이 넘었던 (주)금호 사장으로 긴급투입되어 2년만에 순이익 120억원 규모의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1984년 일본 유수의 기업인상인 이글클럽 최고경영자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금호타이어]]는 세계 10대 타이어 메이커로 성장했고 [[금호석유화학]]은 세계 7위의 합성고무업체가 됐다. 박정구 회장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중국시장 진출인데, 1996년 [[금호고속]]과 금호타이어를 국내 업체 중 최초로 현지에 진출, [[난징]]에 타이어 생산 공장을 준공, 특히 남경 공장은 영업개시 3년만에 흑자를 냈었고, 2011년까지 중국 타이어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였다. [[선전시]], [[우한시]], [[항저우시]] 등에서 벌이고 있는 고속버스 운송사업도 60여개 신설 노선을 확보하는 등 중국 성(省) 내에서 최대의 운수회사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 때 즈음 [[아시아나항공]]의 중국 노선 개척에도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중국발 환승객 유치를 통해 아시아나항공이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6년 4월 6일, 큰형 [[박성용(기업인)|박성용]]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 그룹 회장직을 이어 받아 총수직에 오른 뒤 '비전 경영'을 내세우며 기존 사업을 통폐합하는 등 내실을 다지고, [[아시아나항공]]을 단기간에 세계 중위권 항공사로 성장, 리조트 등 신사업을 개척하며 [[금호그룹]]이 재계 순위 10위권에 진입하는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1년 2월 [[폐암]] 판정을 받았고, 미국의 암 전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그 해 9월달에 귀국하여 요양해왔으나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2002년 7월 13일 모친인 [[이순정]] 여사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의 옆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박삼구]]가 회장을 승계했다.[* 이후 [[대한통운]]과 [[대우건설]]의 무리한 인수로 그룹 자체가 흔들리더니 결국 [[형제의 난]]으로 [[박찬구]]가 [[금호석유화학]]을 갖고 나갔고, 금호그룹의 유서깊었던 [[금호타이어]]도 계열 분리되었으며, [[박인천|아버지]]가 설립했던 [[아시아나항공]]마저 매각하게 되어 그룹 자체가 쪼개지는 최악의 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결국 2020년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해체되어 [[금호고속]]과 [[금호건설]]로 나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제 범금호가를 대표하는 그룹은 [[금호석유화학그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