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제가 (문단 편집) == 생애 == 1750년 왕실 승지 박평과 이씨 사이에서 [[서자]]로 출생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신분이 서자였던 탓에 승지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아버지 박평은 박제가를 아끼고 잘 대해주었으며 박제가에게 글재주가 있음을 알자 아들이 글을 배우도록 도와주었다. 1761년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법은 [[서울특별시|한양]] 도성 내에서 집을 사고 파는 것으로 위장한 채 함부로 일반 백성들의 집을 빼앗는 행위를 금하였는데 이를 '탈입(奪入) 금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조]]가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지 점검하고자 불시에 위반자 목록을 보고하라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제가의 아버지랑 어머니인 이씨가 걸려든 것. 박제가의 어머니가 소유한 집을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아서 주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신하들은 "박제가의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고 이씨가 미망인이자 첩인 점을 감안해서 정상 참작하자"고 했지만 영조는 "일일이 사정을 봐줘서는 끝도 없다"는 다른 신하의 주장을 인용해서 "원칙대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에서 금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은 벽지 유배형이었지만 이씨는 여자라서 유배형에 처할 수 없었고 아들 박제가 또한 당시에는 11세 미성년자였는지라 대신 집안 노비 중 1명을 [[함흥시|덕원]]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어머니 이씨는 이 사건 이후 집안을 나와야 했으며 이후 허드렛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야했기에 박제가는 가난하게 살아가야 했다. 청교, 필애, 묵동을 돌아다니며 이사를 다녔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아끼며 가난한 살림에도 박제가가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글재주 뛰어난 명사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서 아들에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며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주기도 했다. 1766년 박제가는 17세 나이로 스승 이관상(李觀祥)의 첩이 낳은 둘째 [[서녀]]와 결혼했다. 장인어른이자 스승인 이관상은 박제가를 아껴 박제가 부부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집에 거주하게 하며 박제가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배려를 해주었다. 박제가는 아내와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두었다. 그 와중에도 일찍이 서화(書畵)의 재주가 뛰어난 영향 탓에 신동으로 평가받았으며 1768년 스승인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 연구자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북학파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 1769년 박제가는 박지원을 만나 그와 친분을 가지게 되어 스승으로 섬기면서 박지원에게 많은 지식을 배웠으며 이외에 [[이덕무]], [[홍대용]], [[유득공]]과도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773년 박제가가 24세가 되었을 때 그 해 겨울에 어머니 이씨가 고작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이씨가 사망한 원인은 과로사였다. 이씨는 아들의 공부를 할 비용을 댄다고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새벽에도 일할 정도로 과로를 했다. 그래서 과로로 인해 몸이 허약해졌는데 그 와중에도 일을 손에 놓지 않다가 결국 쓰러져 죽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각별했던 박제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박제가가 지은 『초정전서(楚亭全書)』, 「서풍수정기후(書風樹亭記後)」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픔을 말하고 있다. 1779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되었으며[* [[류득공]], [[이덕무]],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정조가 최초로 임영한 초대 4검서이다. [[영조]] 때부터 서얼 출신도 문과 실시가 가능했고, [[정조(조선)|정조]] 때부터는 [[청요직]]인 규장각 검서관까지 진출을 하였다] [[청나라]]로 가서 청나라 [[왕조]]의 문물 및 유물을 접하여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었는데 이 때를 기록하여 <[[북학의]](北學議)>를 집필했다. 이 때부터 박제가는 다산 [[정약용]]을 만나서 그와 친구가 되어 교류를 나누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청하기도 하였다. 1791년 [[정조(조선)|정조]]의 원자(훗날 [[순조]])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베이징|연경]]에 건너갔다. 정조 사후인 1801년 연경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자마자 '흉서 사건(凶書事件)'의 주모자인 윤가기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함경도]] [[종성군|종성]]으로 귀양을 갔고 1805년 귀양이 풀렸으나 향년 56세로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