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종규 (문단 편집) == 생애 == [[1930년]] [[경상남도]] 창원군 구산면(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교토시]]에서 성장하였다.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하사관으로 복무 중 육군종합학교 제5기로 입교해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파일:/image/001/2011/05/15/PYH2011051507040001300_P2.jpg|width=500]] [[1961년]] [[5월 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지켜보는 정변의 주도 세력. 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1961년]] [[5.16 군사정변]]의 핵심 요원으로 참가하여 [[박정희]]의 경호, [[공수부대|공수특전단]] 출동, [[국무총리]] [[장면]] 체포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반도호텔 장면 집무실로 쳐들어왔을 때 걸려온 [[CIA]] 한국지부장 드 실바의 전화를 받고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미국]]측을 설득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의 [[경호]]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과 동시에 경호대장으로 근무했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1964년]] 5월 [[대한민국 교육부|문교부]] [[차관]]으로 이동한 [[홍종철(1924)|홍종철]]의 후임 [[대통령경호처장|대통령경호실장]]으로 [[승진]]했다. 대통령경호실장 으로 재임하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를 후원했고, 암살사연구(1971)와 그 속편(1973)을 집필하였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10809004625c000c010-001.jpg]]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함께. [[1973년]] 12월 자신과 [[권력]] 다툼을 하던 [[이후락]]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실각하자 [[2인자]] 노릇을 하였다.[* 그 보다 4년전인 [[1969년]] 비서실장 자리에서 [[3선 개헌]] 여파로 당시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함께 물러나 두어달 뒤, [[주일대사|주 일본 대사]]로 좌천될 때인 [[김계원]]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 시절도 포함. --한두번의 임시적 2인자--] 이 때 이후락을 몰아내고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윤필용 사건을 크게 키웠다는 설이 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인하여 경호실장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휘하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과의 총격전을 벌이다가 실수로 합창단원인 장봉화 양[*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에게 총을 쏴 사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박종규는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권총]]을 떨어뜨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대응을 못해 더 까였다. [[파일:u4VoBh2.png]] [[파일:/image/108/2005/02/11/2005021119402128109_1.jpg]] 당시 송출된 방송 화면 캡쳐 장면. 두 번째 사진에서 단상 가운데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이 박종규 경호실장이다.[* 두 번째 총성이 울리자 귀빈석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난 박종규 경호실장이 단상 중앙으로 달려 나오며 허리춤의 권총을 뽑다가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당시 중계영상에 담겨 있다. 박실장의 다른 쪽 손에는 행사 기록부가 들려 있다.] 왼쪽 하단의 검은 형체는 [[문세광]]이다. [[1978년]] [[12월]]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산시]]-[[진해시]]-[[창원군(행정구역)|창원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영삼]]을 구속하려 하자 [[지역구]] 민심 때문에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같은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황낙주]]와 자주 접촉하였다.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고 의원직 사퇴는 물론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이후 죽기 전까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지내다가 [[1985년]] 12월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는데 사인은 [[간암]].[* [[10.26 사건|10.26사태]]로 [[박정희|주군]]을 잃은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연신 폭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노스롭 스캔들]]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재산 헌납 후에도 다른 이의 명의로 이미 많은 재산과 [[회사]]를 소유하고 있던터라 정재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은 물론 전두환에게도 접근 가능했다. [[제4공화국(드라마)|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이 점이 묘사되었는데 본인이 헌납 대상 명단에 포함된걸 이미 알고 대놓고 전두환에게 '날 밟고 가시오'라고 자폭해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