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종천(1960)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80년대에야 전기가 들어온 여수의 한 [[오지]]서 태어나 여러 차례 전학을 다닐 정도로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순천공고]] 1학년 때 단순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축구부[* 지금은 해체되었다.]에 들어갔으나 벤치만 지키다가 순천공고 체육선생의 권유로 [[광주진흥고]] 농구부로 옮기며 늦은 나이에 농구를 시작했고, 광주진흥고 농구부가 [[어른의 사정]]으로 해체된 뒤 서울체고로 전학을 갔다. 서울체고 3학년 때 잠재력을 터뜨리면서 고교 제일의 [[센터(농구)|센터]] 유망주로 떠올랐고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끝에 [[연세대학교 농구부|연세대학교]]가 그를 손에 넣었다. 대학 시절에 착실히 성장하면서 대학 무대에서도 괜찮은 센터로 활약했고, 한때는 [[고려대학교]]의 49연승 기록을 바라만 봐야 했지만, 4학년 때는 주장으로 고려대를 누르고 다시 패권을 연세대가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무렵에는 고교 졸업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거취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의 승리자는 현대전자. 실업 무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현대전자의 [[농구대잔치]] 3회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이바지하였다. 당시 대표로서 활약하면서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급 선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점차 무릎 부상이 악화되면서 다소 이른 나이인 28세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에 현대증권에서 평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농구]]와는 잠시 멀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