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진경(군인) (문단 편집) == 생애 == 1920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대정익찬회]] 간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진주고등학교|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여 [[일본]] [[오사카대학|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영문학과|영어과]]에서 공부하였다. [[태평양 전쟁]] 때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에서 [[일본군]] 38군단 소속으로 복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대학에서 영어과를 졸업한 경력을 살려 [[조선경비대]]에서 활동하여 [[미군정]]의 호감을 샀다. 그리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과 11연대장 등을 거쳤다. 1948년 5월 6일 [[제주 4.3 사건]] 당시 [[김익렬]]의 뒤를 이어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이 되었다.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과 선무공작을 중시하던 김익렬과 달리 박진경은 강경한 진압작전을 펼쳐 제주도민 수천여 명을 무차별 체포하였다. 그가 부임한 지 한 달 열흘만(1948년 5월 6일 ~ 6월 18일)에 소위 '포로'만 6,000여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1948년 6월 1일 [[대령]]으로 재빠르게 승진한다. 하지만 6월 18일, 승진축하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는 도중 새벽 3시 15분경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총알 2발을 맞고 암살됐다. 문상길은 이후 재판에서 박진경이 '''"[[학살|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그의 진압작전을 비판했다. 한편 미국 [[CIC]]에서 9연대 병장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의 군인들이 존경하는 군인으로는 [[김익렬]], 증오하는 군인으로는 박진경을 각각 꼽았다고 한다. [[김익렬]]은 훗날 이 설문조사 결과를 자신의 [[수기]]에 적어놓았다. 박진경의 장례식은 육군장 제1호로 치러졌으며 문상길을 비롯한 암살자들은 재판을 받고 1948년 9월 2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