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진경(군인) (문단 편집) == 논란 ==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었다. 당장 제주도에서는 충혼묘지에 그의 [[http://www.jejuhistory.co.kr/bbs/view.php?id=local&page=4&sn1=&divpage=1&sn=off&ss=on&sc=on&cate=type&cate_no=18&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10|추도비]]가 1952년 세워졌고, 1968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남해군]] 군민공원에는 1990년 그의 [[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9|동상]]까지 세워졌다. 특히 그의 고향인 남해에서는 그의 [[양자(가족)|양자]]인 국회의원 [[박익주]]의 영향력까지 겹치며 '창군 영웅'으로까지 여겨졌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일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편 연구가 박명림은 그의 토벌작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박진경은 이러한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을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