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진순 (문단 편집) === 한인사회당 === 1917년 4월, [[이동휘]]가 '독일정탐', '동중철도 파괴공작'의 주도인물이라는 혐의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군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이동휘는 하바롭스크로 이감되었다가 다시 아무르주 알렉세예프스크의 군감옥으로 이감했다. 박진순은 2명의 동지와 함께 이동휘 석방을 위한 대표로 선정되어 러시아 정부 당국과 교섭했다. 그러나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동휘는 7개월이 지난 11월 하순 정권이 뒤집히고 나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진순은 자신의 이력서에서 1917년 5월부터 볼셰비키의 강령을 받아들여 한인들 사이에서 볼셰비키의 정신을 확산하는 운동을 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는 자신이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소집을 위한 조직위원회에 들어가 1918년 4월부터 열린 위원회의 위원을 맡았다고 이력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소집을 위한 조직위원회’는 박진순의 이력서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박진순이 한인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기록은 그의 이력서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한인사회당 발기인 중 한 명이고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던 이인섭의 회고에도 박진순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1918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차 전로한족중앙총회에 참석한 그는 얼마 후 체코 군단의 봉기가 일어나고 백군과 외국군이 연해주 일대를 장악하자 올가로 향했다.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회에서는 한국 혁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를 한 후 강령을 채택하였다. 1919년 3월 초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로 하고 박진순, 이한영, [[박애(독립운동가)|박애]] 등 3명의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3개월이 지난 7월, 3명은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내전이 진행되고 있던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이한영은 옴스크에서, 박애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병이 들어 계속 갈 수가 없었다. 박진순만이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