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진순 (문단 편집) === 이후의 행적 === 1925년 여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의 권유에 따라 중국 북간도의 당 학교와 신문 편집 사업에 관여하였다. 1925년 10월 천도교 산하 단체인 조선농민사의 농민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가입을 위한 해외 대표로 선정되었다. 1926년 초 조선농민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활동하였다. 박진순은 1926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보고자 자격으로 일했다. 그는 1929년 중국 간도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기관지 <볼셰비키>의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193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출판사 조선과에서 교정인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이 그를 덮쳤다. 테러 단체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그는 소련 최고재판소 군협의회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1938년 3월 19일 총살되었다. 그 후 1956년 7월 18일 소련 최고회의 군협의회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진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