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한이 (문단 편집) == 개요 == ##나무위키:편집지침/특정 분야/문화예술: 문화예술인 문서의 개요 및 평가 문단에서 볼드체, 밑줄과 같은 강조 표현 사용을 예외 없이 금지합니다. 문화예술인 문서의 개요 문단에서 서열을 나누는 서술을 금지합니다. 이는 문화예술인 개인의 문서와 문화예술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스포츠 팀, 구단, 크루 등)에 모두 적용됩니다.## > "삼성 라이온즈는 박한이 입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삼성 라이온즈는 8번 우승했는데, 그 중 박한이의 현역 시기에 7번 우승했다. 첫 우승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1985년 통합 우승]]은 한국시리즈 거치지 않은 통합 우승이기에 박한이는 삼성 라이온즈의 모든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하였다.][* 여담으로 양준혁의 신인시절인 1993년은 삼성이 준우승을 했고 박한이도 신인시절인 2001년에 팀이 준우승을 했다. 둘은 신인왕 후보에도 오른 적이 있다.] >---- > [[양준혁]] 前 [[삼성 라이온즈]] 소속 외야수이자 現 [[삼성 라이온즈]] 코치. 외야의 주인이 수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묵묵히 대구의 외야를 지키던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라이온즈에서 꾸준히 제 역할을 해온 꾸준함의 대명사로 현재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모든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1985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규정상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였으므로 개최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한 사례이다.][*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 MVP까지 차지하였다.] 또한 데뷔 이래 16년 연속으로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선수이며 이를 오직 한 팀에서만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 데뷔 이래 16년 연속 100+안타는 KBO 최고 기록으로 팀 선배였던 [[양준혁]]과 동률이며, 중간에 해태와 LG를 거쳤던 양준혁과는 달리 박한이는 오직 삼성이라는 한 팀에서만 기록을 작성했다. 2017년 부상과 노쇠화로 출장 기회가 적어지면서 17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9년간 꾸준히 라이온즈의 1군에 자리하며 역사를 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선수다. 영구결번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었던 선수로, 실제로 스탯티즈 기준 삼성 라이온즈 한 팀으로 한정하면 누적 WAR 4위다. 별명은 "카니", "바카닉", "바카니", "킁킁이", "킁킁갑", "[[하니(달려라 하니)|하니]]"[* [[달려라 하니]]의 그 하니 맞다. [[이우의 야구수첩]]에서 하니로 나온다. 2008년 응원단장 [[김용일(1977)|김용일]]이 경기 응원 중 [[달려라 하니]]의 주제가로 응원가를 만든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응원가에 대한 박한이의 반응은 "그거 하지 마소."라며 싫어했다고.], "[[하마]]"[* 큰 엉덩이 때문에 [[류중일]] 감독이 붙여준 별명(...).] 등 그리고 2013년 FA 계약 이후에는 시장에 거품이 잔뜩 낀 와중에 일찌감치 삼성과 비교적 싸게 재계약하면서 "착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선수 본인은 "착한이"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한다고. 2018 시즌이 끝나고 [[박정진]]과 [[임창용]]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KBO리그에서 뛰는 선수 가운데 현역 최고령 선수[* 차고령자인 [[박용택]]은 1979년 4월 21일 생으로 박한이보다 생일이 3달 늦다.]에 올랐다. 하지만 음주운전으로 인한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했기에 삼성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던 영구결번 지정 여부는 당연히 무의미하게 됐고, 은퇴식마저도 치르지 못했다.[* 다만 자숙 기간을 갖다가 2021 시즌을 앞두고 코치로 삼성 라이온즈에 복귀하면서 구단 재량으로 은퇴 관련 행사를 치뤄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생긴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