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훈근 (문단 편집) === 고교-대학 시절 === 부산 중앙고 3학년 시절, 당시 동년배 중 최강센터였던 [[서장훈]]에 이어 고교 No.2급 센터로 손꼽혔었다. 당시 부산중앙고 동기로 [[추승균]], [[박규현]]이 있었는데, 이들 3인방은 1992년 5월 협회장기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부산중앙고 농구부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가을 전국체전까지 제패, 2관왕의 위업을 달성한다.[* 1992년도 부산중앙고의 전국대회 2관왕은 이후 2016년 [[양홍석]](199cm,C)-서명진(190cm,G)-곽정훈(193cm,F) 트리오가 전국대회 3관왕을 달성할때까지 24년간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서장훈]]-[[현주엽]] 콤비의 휘문고(3관왕)에 이어 1992년도 전국 No.2팀의 주전센터였던 박훈근은, 같은 해 열린 베이징 아시아청소년농구 대표팀에 팀동료 동기 [[추승균]]과 함께 뽑혀[* [[추승균]]은 대체 선발이었다. 원래 선발인원이었던 [[전희철]], [[김병철(농구)|김병철]], 박준영(이상 고려대 1), [[우지원]](연세대 1)이 [[고연전]] 대비 출전을 위해 빠지는 바람에(;;;) 명단 발표 한 달만에 이들 명문대생 멤버들은 고교생인 [[이세범]], 전재경(이상 용산고 3), 이종호(대경상고 3), [[추승균]](부산중앙고 3)으로 긴급 교체되는 촌극을 빚었다. 박훈근은 최초 12인 엔트리 멤버였다.] 대회 준우승 멤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화려했던 고교시절 활약 덕분에 박훈근은 당시 대학팀들간 스카웃의 표적이 되었고, 당시 고교 유망주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던 [[고려대학교]]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 중이던 [[1990년대]] 초 라이벌 연세대, [[중앙대학교|중앙대]]는 물론 [[경희대학교|경희대]]에도 밀리는 성적으로 자존심을 한껏 구겼던 [[고려대학교|고려대]]는, 92학번 [[전희철]], [[김병철(농구)|김병철]] 콤비를 시작으로 고교 유망주들에 대한 분노의 싹쓸이 스카웃을 시작했고, 93학번에선 최대어 [[서장훈]]을 놓친 대신 고교 랭킹 2~4위라던 박훈근, [[양희승]], [[박규현]]을 전부 영입한데 이어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캘리포니아 특급" [[박재헌]]까지 입학시킨다.[* 당초 고려대는 [[추승균]]까지 부산중앙고 3인방을 전부 데려갈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박재헌]]을 데러오게 되면서 [[추승균]]을 포기했고, 중간에 붕 뜬 추승균은 급히 한양대로 진로를 틀어야만 했다. ~~그리고 전설의 시작~~] 덕분에 고교시절 촉망받는 센터유망주였던 박훈근은 같은 포지션에 대학생 국가대표이자 1년선배 [[전희철]]을 비롯, 3학년 전수훈(195cm), 동기 [[박재헌]], [[양희승]] 등 너무도 많은 경쟁상대들이 있었고, 광주고 시절 센터 라이벌이었던 입학 동기 [[양희승]]이 외곽슈터로의 포지션 변경에 성공하며 금세 주전 [[스몰 포워드]] 자리를 꿰찬 반면, 박훈근은 비슷한 스타일의 [[전희철]]에 밀려 후보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듬해엔 슈퍼루키 [[현주엽]]까지 가세한 탓에 고려대에서의 4년 동안 후보선수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박훈근이 2학년이던 1994년부터 대학생 국가대표 [[현주엽]], [[전희철]]은 수시로 국대에 불려가야 했고,[* 1994년: 캐나다 세계선수권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 1995년: 서울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이들이 국대차출된 사이 열린 [[대학농구연맹전]]에서 박훈근과 [[박재헌]]이 함께 이들의 공백을 메운 덕분에 고려대는 [[1994 대학농구연맹전|1994년]]과 [[1995 대학농구연맹전|1995년]] 대회에서 연속우승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대회였던 [[농구대잔치]]에선 이들 국대멤버가 모두 복귀한 탓에, 박훈근은 출장기회조차 잡기 힘들었고, 들쭉날쭉한 출장시간 탓에 기량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이바람에 당시 농구인들 중 다수는 "고려대의 중복스카웃 때문에 많은 유망주들(박훈근, [[박규현]], [[박재헌]] 3박을 주로 언급했다.)이 고사되고 있다."고 언급했고, 특히 [[최부영]] 당시 경희대 감독은 "고대 후보 선수 중 아무나 줘도 경희대를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전희철]]이 졸업한 [[1996 대학농구연맹전|1996년도]]에도 박훈근은 대부분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고, 하반기들어선 신입생 [[이규섭]]에게도 기회를 뺏기는 모습을 보였다. 1996년 창단한 [[창원 LG 세이커스|LG 반도체 농구단]]이 신생팀 연고지명 대학으로 고려대를 택하면서[* 당연하게도 국가대표 슈터 [[양희승]]을 염두해 둔 선택이었다.] 졸업 직후 박훈근은 [[양희승]], [[박규현]], [[박재헌]]과 함께 신생팀 LG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