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계수록 (문단 편집) == 의의 == 대부분의 주장들은 왕조가 새로이 개창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이상안(理想案)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반계수록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해 전국의 많은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18세기]] 후반에 영조가 지원까지 해주면서 [[실학]](實學)이란 학풍을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익(실학자)|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이 반계수록에 영향을 받았다. 반계수록은 당대에는 무시당했으나[* 동시기 학자 [[윤증]], 배송유, [[이현일(조선)|이현일]] 등이 주목하긴 했다. 윤증은 발문, 이현일은 반계수록 서문을 써줬을 정도.] 훗날 영조대에 재평가받아 왕의 명으로 3부가 [[남한산성]]과 사고에 보관되었고,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의 개혁방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형원을 흠모한 [[안정복]]은 "참으로 천리(天理)를 운용하여 만세를 위해 태평을 얻어주는 책이 아닐수 없다”고 평가하고 [[1776년]]에 직접 반계선생연보를 편찬했으며, 정약용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유형원의 축성 이론을 적용했다. [[정조(조선)|정조]]는 반계수록보유(磻溪隨錄補遺)를 읽어본 후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과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쓰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 저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며 극찬했고, [[수원화성]]을 자신보다 일찍 기획했다는 이유로 이조 참판에 추숭했다. 지나치게 과격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안들이라 당대엔 외면했지만, 훗날엔 나라에서도 국가의 개혁에 몸을 불사른 의기 정도는 높이 평가해준 셈이다. 물론 이후의 실학자들에 비하면 허무맹랑하거나 미숙한 주장들도 있지만, 현대에 같이 묶이는 다른 실학자들보다 100년에서 150년 정도 이전의 인물이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분류:조선의 도서]][[분류:부안군의 문화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