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반공주의 (문단 편집) === 대한민국에서의 반공주의 === [[파일:external/archives.kdemo.or.kr/00720574_0001.jpg|width=850]] >'''"난 [[북한 노동당|공산당]]이 싫어요!"''' >---- >[[이승복]] 어린이[* 북한 간첩에게 살해당할 때 남긴 말이라 한다.] [YouTube(WMrMjtaF5A0)] 대체로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가]]들 중 우익 계열은 좌익 계열 공산주의자를 여러 가지 이유로 경계했다. 우익 [[독립운동가]]들의 대체적인 생각들은 '좌익들은 자주 독립을 하자고 말은 잘하면서, 왜 저렇게 [[소련]]에 기대려고 하냐'[*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41년에 일본이 [[진주만 공습|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까지 미국은 조선 독립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어떠한 도움도 안 줬다. 반면 소련은 [[코민테른|레닌이 전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상해 임시정부에 40만 루블을 독립자금을 지원할 만큼 관심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울러 조선 역사학자 정인보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 특사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러시아인과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8039|"조선 사람이 왜 '빨갱이'를 좋아하는지 아시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부터 불과 5년 전인 [[러일전쟁]]때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려는 조선인 항일 의병들인 선견한국분견대는 무려 17,323명에 달했다.[[http://cafe.daum.net/historywar/2LjP/888|러시아군과 연합 작전을 계획했던 항일 의병부대들.]] 다만, 1941년부터 [[미국]]은 조선 [[독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매우 큰 도움들을 주었다. ] 였거나 아니면 [[공산주의]] 자체를 아주 혐오하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여기에 속하는 독립운동가 분들 중 하나가 놀랍게도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약도 주지 않고 치료도 거부하는 등 매우 매몰차게 대했다고 한다. ] 물론 좌익 측에서도 [[미국]]에 의존하는 측면이나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장점을 받아들여 우익을 싫어하는 일도 흔했지만 사이가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자유시 참변]]. 같은 고려공산당 계열 독립군끼리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나뉘어 주도권을 잡겠다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이르쿠츠크파가 소련군까지 끌어들이게 되고 상해파는 몰살을 당한다. 지휘권 하나 잡겠다고 같은 독립군을 그것도 외국군을 끌어들여 몰살시키는 걸 똑똑히 본 비좌익계 독립군 상당수가 반공주의자로 돌아서게 된다. 또한 우익 독립운동가는 [[민족주의]]자였고, 자주독립의 의미에서 '''일본처럼 소련도 또 하나의 외세'''로 평가했기 때문에 반공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다. [[아시아주의]]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동아시아에는 서양과 동양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그 중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친 일부 사람들이 1930년대에 친일로 전향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민생단 사건]]이다. 일제강점기에 [[니항사건]]이나 스탈린의 [[강제]]이주 등의 진면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일부였다. 그래서 광복 직후엔 좌파 성향이 우세했지만 그 과거의 일이 알려지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소련을 위해 재산을 약탈하고 각종 유혈 범죄를 일으키자 민심이 점점 이탈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던 민간인에게 광복 이후 북한 지역 [[소련군정]]은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용암포와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공학생사건]]에 대해 유혈 진압을 단행했고,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서'에 근거해 발전소, 제련소, 제철소, 공장 등 국가 주요 공업 시설 및 설비와 양곡 244만 섬, 한우 15만 마리, 말 3천 마리, 돼지 5만 마리를 무단 반출했으며, 주민의 은행예금도 무단 공출한 데다 이것들을 범죄적으로 약탈, 소련으로 무단반출하여 북쪽에서 반공주의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데 기여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72645|#]] 신의주 제1 교회에 시무했던 한경직 · 윤하영(1889~1956) 목사가 겪었던 상황이 기록됐다.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며 “상상을 넘어선다”며 소련군의 만행을 자세히 기술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탈취했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https://news.joins.com/article/21847679|#]]이 시기에 월남한 대표적인 반공주의자가 [[최능진]]이다. 이후 북쪽에서 진행된 각종 유혈 범죄에 반발해 월남한 [[개신교]] 인사, 조선민주당, 청년, 농민, 공업 시설 근로자, 지주, 남한 지역에서 [[서북청년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남쪽은 [[미군]]이 들어와 일단 민족 우익 진영과 친중[* 현재의 [[대만]]. ]/친일 우익 진영이[* [[중화민국]]은 우익 성향 국가였기 때문에 한국 우익 독립운동가는 미국과 중국과 연대를 많이 했다. 친일 세력은 국정 운영을 이어간다는 이유로 '''남북 둘 다''' 그대로 등용했다.] 성립됐으나, 남쪽마저 공산화를 시키려는 친소련 공산주의자들과, 미군정 및 우익들의 대립이 시작되고 좌파와 우파들은 서로에게 테러를 시도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으로 인해 갈라져 동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구 [[일본군]] 출신들이 일부 북한군과 [[대한민국 국군]]에 양쪽에 유입되면서 [[방공협정]] 체결을 추진할 정도로 반공주의자들 천국이던 일본군 반공 구호가 일부 수정되어 이식되었다고도 한다. 아니, 일본제국 자체가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이 활개치고 [[치안유지법]]으로 공산주의를 잡던 국가였다. 다만, 일본제국은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좌익이건 우익이건 독립운동가들이라면 체포해가던 악질 국가였다. ] 이때까지도 국민들은 그다지 나라 상황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광복 이후 미군정에서 정부 수립기로 가는 과정에서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 사건]] 등에 의한 좌우 대립 속에서 무고한 사람이 단체로 죽는 일 또한 발생됐었다. 미군정이 1946년 8월에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7% 달했다.[[https://m.blog.naver.com/dreamteller/221049872942|#]] 그러나 대한민국 전 국민이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50년,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이었다.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공산군이 쳐들어와 도시 하나하나를 점령하며 식량을 징발하고, 얼마나 가혹했었는지 토지 1평당 작물 포기 수, 포기 당 이삭 수, 이삭 당 곡식알 수를 일일히 헤아려 수확량을 판정하였으며 이는 일제 하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수탈이었다. 게다가 전국 점령지 주민 가운데 18세~36세 남성 대략 20만명을 "인민의용군"으로 강제동원하였다. [[조선인민군|인민군]]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고, [[인민재판]]을 열어 조금이라도 공권력과 연관이 있으면 모두 처형하다가, 나중에 [[유엔|UN]]군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민군은 아예 학살을 벌이며, 혼란 속에서 국군 등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죽는 사건까지 벌어지며 사실상 휴전 후 공산주의라면 학을 떼는 수준이 되었다. 이북 사람들까지 공산군과 폭격을 피해 단체로 남쪽으로 피난을 오기까지 했으니, 수십만 명이 죽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대한민국 인구가 늘어날 정도였다.[* 게다가 북한 출신 반공주의자들이 남한에 대거 유입되면서 원래 강했던 반공주의가 더욱 심화되었다. [[서북청년단]] 문서로.] 전쟁 전 남한 인구는 2,050만 명인데 1955년 대한민국에는 100만 명이 더 늘어났다는 게 그 증거이다.[[http://www.unityinfo.co.kr/sub_read.html?uid=24539§ion=sc4|#]][*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 온 가장 큰 이유는 미군의 폭격, 특히 머지않아 미군이 이북 땅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이북 주민들이 모두 죽는다는 공포심에서였다는 증언도 있다. 출처: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저/ 창비][* 또한 저자 김태우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어머니가 한국전쟁 중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공산당 검열이 아니라 미군의 폭격이었다고 한다.[[https://photohistory.tistory.com/14979|링크]]] 이때 월남한 사람들 및 그 후손 대부분은 전쟁 당시 김일성을 따르는 정치세력이나 소련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행, 사살, 약탈을 자행했음을 증언했다. 북한 지역에서 실시된 무분별한 범죄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토지와 재산[* 국가 소유 공공시설 재산이나 박물관 재산을 트럭째로 옮겼다. 반란은 유혈진압으로 제압하고, 소련군 성범죄도 기록되어 있다.]을 잃는 광경을 본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도 자신과 가족이나 [[재산권]]을 보호하고자 하였고, 근로 노동의 대가와 자유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 국군에 입대하거나 반공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자유당]] 문서로.] 현재도 이들은 [[북한/인권|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국제연합과 관련된 외교적 노력을 하거나 그러한 정책을 지지하는 중이다.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에 [[중공군]]까지 참전[* 불법 개입. ]하자 한반도의 반공주의 성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반공주의는 크게 1950년대 말기 및 4~5공 시절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악용되어온 권위주의적 반공주의와 현 민주화 이후 6공 체제에서 새로 생긴 자유민주주의적 반공주의로 나뉜다.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은 반공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