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기독교/한국 (문단 편집) === 과거 === [[조선]]시대에 [[가톨릭]]이 처음 유입되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이익(실학자)|이익]]의 제자들은 이를 수용하는 측과 이에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었는데, [[안정복]]은 '천학문답'을 지어 내세론을 통해 전도하는 모습이 [[불교]]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숭유억불]]이 강고한 시대였던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불교를 어떻게 여겼는지 생각하자. 이후 제례 거부 등의 문제에 따른 정부의 박해와 지속적인 서양 세력의 위협([[신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드러났으며, '야소꾼', [[예수쟁이|'야소쟁이']] 등의 비칭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개화기 이후 서양 세력과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기독교(가톨릭/개신교 모두)의 확산은 더 널리 이루어졌고, 정부에서건 민간에서건 기독교에 대한 반응은 온건해진 편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국면은 전환점을 맞는다. 그러나 이 때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에 따라 '주적' [[일본]]에 맞서기 위해 종교계와 공산주의 계열이 연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대표적인 것이 [[6.10 만세 운동]]), 공산주의적인 비판의 중점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식민지적 사회 체제 전반이었기에 따로 부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광복]] 이후에는 북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서는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대성하던 기독교 세력을 포함한 모든 종교 세력이 전멸하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안도 지역은 개신교도의 중심지였고,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 [[선천군|선천]]은 '[[기도(종교)|고개 숙인]] 선천'이라고 할 정도의 지역이었다. 반면 남한에는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이북의 개신교도들, [[미국]]의 원조와 더불어 정치계와 야합속에 개신교가 급속도로 세력을 불렸다. 가톨릭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양지로 나오면서 세력을 불리다가 6.25전쟁과 민주화 운동 시기에 개신교와 어께를 나란히한 주류 종교로 발돋움했다. 여기서 4명의 추기경을 배출하고 1984년,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는 등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