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기독교/한국 (문단 편집) === 기독교 세력의 확대 === [[군사독재]] 정권을 중심으로 이뤄진 급격한 [[산업화]]는 전쟁 이후에 그 최소한의 형태만이라도 유지해오던 공동체마저도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올 수 있는 노동자들의 모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 등은 아예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는데, 이 시대에 이뤄지는 정서적인 교감이나 지적인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은 어떤 것이 되었건 간에 정부가 나서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계모임이나 반상회와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이 정서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것이 가능한 공동체를 찾게 되는데, 이때 대안으로 나온 것이 교회를 통해 이뤄지는 개신교 공동체였다. 이 당시 한국의 기독교의 신학적 연구는 [[구한말]]에 외국인 [[선교사]]가 들여왔던 상당히 정통적인 신앙이 주류였고, 일제강점기부터 금주, 금연운동 같은 권면 운동을 전개했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신사고 운동이라는 이단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 번영복음을 미국에서 들여오면서 모든 개신교가 상당히 기복화되었고, 이는 한국 사회의 세속적인 풍습과, 자본주의적 논리와 결부하여 기독교 종파가 빠르게 세를 확장해왔다. [* 흔히 한국 사회의 민속 신앙과 결부하였다는 말은 [[조용기]] 목사의 방언을 중시하는 교풍 때문이다. 원래 순복음교회가 속한 오순절교회가 방언을 중요시한다.] 여기서 모든 개신교 종파가 밴치마킹하는 것이 바로 번영복음의 시초인 [[수정교회]]였는데, 크고 화려한 교회, 다양한 찬송, 편안한 예배를 중시하였고, 교회는 이것을 이루기 위해 소속 신도들에게 '''이웃 주민들을 향한 강압적인 전도를 요구했고 지속적으로 비싼 헌금을 강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했던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자본을 개인이 소유하는 것에서 받게 되는 중압감, 즉 자유라는 중압감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유 자체를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게 이양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일부 기독교 교파들이 막대한 자본을 얻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비교적 단순하고 명료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오래된 종교들과는 달리 [[종교 개혁]]을 겪으면서 새롭게 태어난 종교이기 때문에 유연한 해석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한국의 경우에는 도시화를 통해 부동산을 이용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해온 이른바 '졸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독재 정권에서도 이들을 견제할 이유가 없었던 데에다 이들 자신이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독재 정권이 이용해오던 논리를 그들 또한 따라하게 되면서 이들이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는 개신교 교단 자체에서 이를 공식적인 입장으로서 표명하는 것조차 가능해졌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