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달족 (문단 편집) == [[반달리즘]]? ==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반달리즘이 아니라 [[낭만주의|낭만주의(romanticism)]]다~~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사실 반달을 저지른 적이 없고 오히려 반달족들이 반달당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로마]] 시에 침입하여 수많은 약탈과 문명 파괴행위를 저질렀다고 하여 이들에 유래한 [[반달리즘]], [[반달]]이라는 말이 생겼지만, 사실은 '''이민족이 로마 시를 침공했다는 자체에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에 생긴 말로''' 반달족은 문화 파괴행위보다는 조직적으로 로마 시의 재물을 배로 실어 북아프리카로 옮겼다고 한다. [[반달리즘]]이란 단어는, [[프랑스 혁명]] 때 [[자코뱅파]]의 파괴행위를 반달족에 빗대면서 처음 등장한 단어인데, 학계의 중론은 반달족은 파괴행위를 일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로마 시의 '''문화재를 약탈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문화재가 훼손되었을 뿐 '''의도적으로 문화재를 박살내지는 않았다'''. 5세기의 반달족은 그 스스로도 이미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던 상태였으며, 455년 반달족이 테베레 강을 건너 로마 시를 점령하자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레오 1세(교황)|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를 만나 도시 파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반달족은 순응하며 돌아갔다. 그들은 오히려 북아프리카에서는 자기 언어를 포기하고 라틴어, 막판에는 가톨릭을 채택했는가 하면 문학·신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533년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휘하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두 주일 만에 수도 카르타고를 함락했고, 1년이 못 되어 반달족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오히려 이들이 반달리즘을 당해 모든 자취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