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단 편집) === 성과 === 반민특위의 목표는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등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체포된 인사들은 [[노덕술]], [[최운하]] 등의 경찰 간부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톨스토이라고 불렸던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유명한 [[채만식]], 육당 [[최남선]] 등 문화계 인사, 종교계 인사인 [[최린]] 등이 구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수는 적었지만 친일파를 구속하는 등 약간의 성과는 있었으나 처벌에는 실패한다. 결국 집행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정지 18인 등 겨우 30인만이 제재를 받았고, 실형의 선고를 받은 7인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청구 등의 방법으로 모두 풀려나 친일파의 숙청작업은 실패하고 말았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457&cid=46625&categoryId=46625|#]] 상당수 많은 체포자들은 자기 변명 내지는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다"'''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당시 병중이었던 이광수[* 그런데 재판받을 때 휠체어 타고 가는 한국의 풍경을 생각하면 정말 병중일지 의문.]의 재판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사형을 요구했던''' [[최린]]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납북된 다른 반민특위 인사들에 비해 대접이 나았다고 한다. 다른 반민특위 출신들은 맞아 죽거나 수용소로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들 중에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하는 놈은 빨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민특위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방해한 자들은 좋은 꼴은 못봤다. ] 특히 고문 의혹이 있었지만, 피의자 이광수(우리가 아는 그 춘원 이광수)는 고문이 전혀 없었다고 부인했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0_1949_02_19_0090|#]]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김덕기]][* 친일경찰로 '''[[노덕술]]과 [[하판락]]을 능가하는 최악의 고문왕'''. 심지어 하판락도 이놈에게 고문을 배웠다. [[한국광복군]] 사령부 총영장 오동진(吳東振), 의성단(義成團) 단장 편강렬(片康烈) 등을 체포 또는 옥사케 하여 항일무장독립투쟁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1922년 [[의열단]](義烈團)의 제2차 거사를 좌절시켜 경찰공로기장을 받았다. 그의 자백에 따르면, 16년간 그의 손을 거쳐간 사상범이 1,000명에 달했고, 그중 사형이 1할, 무기징역 1할, 10년 이상의 체형을 받은 사람이 1할 정도였다고 한다. 즉 이놈이 얼마나 악질인지 설명이 필요한가? 심지어 노덕술도 이놈을 극진히 존경했다.] 한 사람이지만, 항소를 했고 6.25전에 풀려난다. 하지만 6.25 때 서울에 남아 있던 덕분에 북한군에게 끌려가서 그동안의 악행을 따져서 4주 동안 맨날 두들겨 맞았고[* 하루에 150대도 맞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독립투사들에게 했던 고문을 스트레이트로 받았고 너무 처맞자 목숨만 살려달라고 울부짖기까지 했다.] 인민재판장에 끌려갈 땐 이미 정신이 나가있었다. 그러고는 죽창에 찔려 황천길 익스프레스를 타고 말았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독립투사인 정이형 씨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530&index_id=cp05300258&content_id=cp053002580001&search_left_menu=|한국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 6개월째의 성과[[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3_1949_07_07_0010|#]]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3_1949_08_31_0120|기소 건수의 50%는 불구속과 보석이었다. 놀랍게도 101건이라고...]]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4_1949_09_19_0100|이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 피의자 처리 결과를 보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