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불교 (문단 편집) == 역사 ==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 때까지는 [[불교]]는 [[국교#s-2]]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고려 망국의 원흉으로 불교계의 타락을 꼽으며, 이후 조선 500년간 반불교에 입각한 [[숭유억불]]을 국시로 간주하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간헐적으로 불교 우대적인 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주류는 반불교 성향이 강했다. [[승려]]의 신분은 사회적으로 팔반사천(八般私賤)으로 격하되었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 신량역천(身良役賤). 신분은 양민인데 직업이 천하다는 뜻이다. 승려가 양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승려 자체가 신분과 상관이 없었고 양반 승려 천민 승려도 있었으나 전부 천대받았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은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했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유교]]에 대한 반감이 더 높고, 사회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거대하고 그에 따른 문제는 매우 극단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반불교 정서는 상대적으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경우 불교가 전파되던 초기에 불교에 대한 비판이 극심했는데 기존 사상이나 종교의 입장에선 새로운 것에 대한 경계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비판 세력의 주체로는 유학자들이나 도교의 신봉자들이 있었다. 한(漢)의 유학자 한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불교를 비판했다. 아래에 이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간골표(諫骨表)라고도 표기하곤 한다.]라는 상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 ① 중국에 불교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역대의 군주가 다 장수하였고 국가가 태평했다. 백성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대였으나 불교가 수입되어 융성해진 결과 어지러워지고 멸망하여 재앙이 많은 시대가 되었다. ② 부처는 오랑캐이고 불교는 오랑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언어와 풍속이 다르다. ③ 불교는 군신 간의 의나 부자간의 정 등 일상적인 윤리를 알지 못한다. ④ 이마를 불태우고 [[연비|손가락을 지지는]] 등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또 경제 관념도 엉성하여 생업에도 종사하지 않게 된다. ⑤ [[사리(불교)|죽은 자의 뼈]] 등은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멀리해야 할 것이다. - 한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5|#]] [[한유]]와 [[헌종(당)|헌종]]을 보면 알듯이 당 헌종이 불골(정확히 말하자면 법문사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다분히 유교적인 시각에서의 불교를 비판한 상소다. 한유가 당송팔대가에 속할 정도로 고명한 유학자인 만큼 그의 이름과 명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종때까지 많이 언급되어 왔으며,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칭해져왔는데, 위에 이 간영불골표는 태종과 세종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조와 인조, 성종. 현종때까지도 계속 언급되어 불교를 경계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