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석평 (문단 편집) === 할머니에 의해 출세한 천얼 === 실록에 따르면, 반석평은 일개 노비가 아니라 어엿한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증조는 선략장군, 충무위 부호군을 지낸 반사덕(潘思德)이고, 할아버지는 한성 판윤을 지낸 반강(潘崗)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반서린(潘瑞麟)이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엔 가문이 몰락해 시골에서 살았고 그나마도 그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의 첩이었기에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반석평이 노비라는 말이 틀리진 않다. 노비 출신이라는 첩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반석평은 얼자 출신인 것인데 얼자는 공식적으로는 천민이었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면천이 이뤄졌다.] 하지만 그의 조모가 그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알고 광주 반씨 가문을 일으키고자 어린 반석평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손자가 학업을 이어가도록 지원했다. 이에 반석평은 자신이 천얼임을 숨기고 과거에 급제해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지위가 육경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그 조모를 현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반석평은 조정에서 여러 하급 관직을 맡다가 중종 8년(1513)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여진족의 실정을 탐문하는 임무를 맡아 북쪽 변경지대에 파견되었다. 반석평은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의 사정을 탐망하고 돌아와 조정에 보고해 중종의 칭찬을 받았다. >반석평(潘碩枰) 같은 자는 이미 변직(邊職)을 역임하고, 대간·시종이 되었기 때문에 변방일과 오랑캐의 정상을 자신이 직접 견문한 바로 면대해 아뢰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닌가! 또한 장차 시종·대간이 될 만한 자를 역시 변지에 기용했다가 다음날 대간·시종을 삼는다면, 또한 각각 견문한 바로 경연에서 면대해 아뢰며 대신들과 더불어 강론할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랴! 전조(銓曹)는 아울러 이런 의도를 알아 거용(擧用)하라. 그러나 대간은 중종 9년(1514) 신분이 미천한 반석평이 홍문관 교리로 기용된 것에 반발해 파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홍문관 그 인물을 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문벌(門地)도 보아야 합니다. 반석평(潘碩枰)은 문지가 미천하기 때문에 이미 서경(署經)[* 국가에서 수령, 경연관, 사관, 대간과 현직 관원의 4품 이하의 관을 임명할 때, 사헌부 및 사간원에 가부를 묻고, 양사는 법전 및 관원의 내외 사조를 조사한 후 하자가 없음을 파악하고 임명에 동의한다고 서명하는 절차]하지 않았습니다. 어영준(魚泳濬)도 문지가 미천하나 전에 수찬(修撰)으로 있다가 수령으로 나갔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욱 근신해야 하는데, 감사(監司)가 계문하여 파면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다시 경연관(經筵官)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 갈으소서. 하지만 중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반석평의 직위를 유지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