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일/대한민국 (문단 편집) === 전근대 === 일본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가야]]와는 우호적이었고 동맹 관계에 교류 역시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고구려]]의 경우 그리 국가관계가 나쁘진 않았으나[* 다만 광개토대왕 시절 신라를 도와 일본을 적대할 때는 일본 정규군을 왜구라고 부르며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워낙 멀어 양국 교류가 백제보다는 적었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워낙 먼 데다 험한 동해 바다가 가로막아 고구려와는 교류, 접촉이 적었다.] 그리고 [[신라]]와는 최악의 관계였다. 역사 기록을 보면 초기 신라에는 [[왜구]]에 의한 약탈이 많았다.[* 이승재(2017)는 삼국 시대 목간의 내용을 토대로, 옛 [[신라어]]로 일본을 뜻하던 '여리'라는 단어가 '[[원수]]', '[[적]]'을 뜻하던 사어화된 [[고대 한국어]] 어휘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관계는 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고, [[신라]]의 전성기인 [[성덕왕]] 때와 [[경덕왕]] 때에 [[일본]]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수백 척의 배를 동원해 신라 원정을 준비했지만]] 주도자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사망하며 중지되었고, [[발해]]와 친교를 맺고 신라를 견제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다만, 백제만큼은 아니라도 나중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비하면 신라 때까지는 일본과의 교류는 매우 많은 편이었다.[* 가령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5백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긴 했다. 신라가 몰락한 [[나말여초]] 때에는 [[신라구]] 해적의 피해로 일본과의 사이가 틀어졌고, 이후 일본이 국풍이 강해지고 고립주의적으로 나가면서 [[고려]]시대 들어서 두 나라의 우호적 교류는 삼국, 신라 때와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도이의_입구|도이의 난]]으로 일본이 [[여진족]]들에게 초토화했을 때 고려가 지원을 해주는 등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그냥저냥 평범한 상태로 이어졌지만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겪은 후 다시 관계가 크게 틀어진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고려는 이후에 벌어진 [[왜구]]의 침탈로 양국간의 감정이 험악해진 것. 정확히 말해 왜구의 침탈은 고려가 몽골에게 한참 얻어터지던 [[원종(고려)|원종]] 시기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이 때 각국의 속사정이 굉장히 복잡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의 경우 고려는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고, 고려 말 왜구는 [[남북조 시대]] 군량을 동원하기 위한 남조 정부의 주도로 대대적인 침략이 벌어졌다. [[세종대왕]]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를 보면 상당수가 왜구의 잔인한 면모를 보인다. 특히 열녀부분을 보면 왜구에게 [[강간|욕을 보이고]], 아니면 그 직전에 [[자살]]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절개를 지키려는 열녀들의 모습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당대 왜구와 그 속에 들어간 조선의 일본 이미지를 알 수 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하고 백성들의 삶이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자, 조선의 대일 감정이 최악으로 치닫았다. 그나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나오고 겉으로나마 조선과 일본이 화해하고 [[조선 통신사]]로 관계를 유지했지만, 양쪽의 앙금은 전혀 풀어지지 않았고 조선 측의 경우 통신사를 통해 필사적으로 일본의 경제와 군사 상황을 알아내 경각심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통신사 제도는 문화 교류의 성격이 커졌다. 특히 왜란은 변경의 전투가 아닌 전면전으로 나라 전체가 비극의 현장이었다. 때문에 다른 국경의 전투나 변경 외적의 노략질과는 다른 차원으로 온나라 백성이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