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일/대한민국 (문단 편집) === 근현대 === [[대한제국]],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그에 따른 조선 침략 정책이 본격화하는 19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과 식민지 통치는 근대 한국인들은 물론, 현대의 한국인들에게도 반일감정을 갖는 근본원인이 되었다. 근대화를 이뤄낸 일본은 조선에 근대적 통상을 요구하면서, [[운요호 사건]]으로부터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는 강압적이고 불평등인 방식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대다수의 조선 백성들은 [[일본 제국]]을 내정간섭을 일삼는 믿지 못할 열강 세력으로 받아들여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일본의 이권 침탈과, 이를 미숙하게 대처했던 조선 및 [[대한제국]] 정부의 실정이 겹친 끝에, 일본은 [[을사조약]]을 거쳐 실질적인 국권을 빼앗고 끝내 [[경술국치]]를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본인과 본격적으로 부대껴 살게 된 한국인들은 강압적인 행정 처리에 익숙했던 [[순사]]와 [[경찰]] 등 일본 제국의 공권력 아래 공포에 떨었고, 일본 출신 이민자들이 일삼는 온갖 차별 대우와 [[갑질]]에 시달리며 울분을 삼켰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목욕탕]]이었다. 일제 치하 조선에서 목욕탕은 유독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두드러지는 공간이었으며, 조선인의 입장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이후 해방 직후 조선에서, 한국인들은 미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히키아게샤]]를 목욕탕 잡부로 부리며 그동안 쌓였던 원한을 풀기도 했다.] 또한 [[다테마에]]와 [[메이와쿠]] 등 세세한 부분에서의 문화 차이로 인해서, 한국인은 일본인에 대해, 일본인은 한국인에 대해 서로에 대한 오해와 [[스테레오타입]]을 쌓아갔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여전히 살아남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친일파에 대한 반감, 좌우 대립과 [[6.25 전쟁]] 등 동족상잔의 비극의 씨앗을 태동시킨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원망, 한국에서의 전쟁 덕분에 오히려 전후 부흥에 성공한 일본에게 느낀 허탈감, 국민적인 [[독도]] 영유권 갈등[* 이과정에서 [[독도대첩]]이라는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전투도 벌어졌다], 식민지와 전쟁범죄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에서 생겨난 국내적 갈등,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 등이 반일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1970~90년대 당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경우,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의도적으로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감추고 부정적인 면들만 보도했다. 여기서 '긍정적인 면'이란 광복 이후 일본의 대한 관계 개선 의지와 산업화 과정에서의 기술적•경제적 지원, 덴노가나 일본 내 시민단체의 과거사 자정 활동 등을 일절 은폐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부정적인 면' 역시 과거사인 광복 이전 식민지 시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해당 시점의 한일관계라는 현실 정치에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같은 자극적인 부분만 보도함으로써, 국민들이 현대 일본국을 구 일제와 같은 집단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들어 결과적으로 반일감정을 키웠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이처럼 행동한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 권위주의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권력 기반이 불안했고, 때문에 [[한강의 기적]] 같은 경제적 업적을 치적으로 선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혈맹이던 [[미국]]은 몰라도 이미지가 영 좋지 않던 __[[일본]]에게마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가치가 퇴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__ * 또한, 패전 이후 [[일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일본은 대한민국을 독재국가라 무시하며 민주화 인사들을 돕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문세광]] 등 재일교포가 [[영부인]]인 [[육영수]]를 암살한 대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__당대 한국 정부에게는 자국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일종의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여졌다.__ * 게다가 독재정권과 느슨한 협력을 유지하던 [[우파]] [[국가주의]] 진영[* 이들은 친일 문제는 비판했지만, 내치에서는 권위주의 정치 및 국가주의를 옹호하거나 최소한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이승만 시대의 주류 반일•반공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우파라도 권위주의•국가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좌파와 손잡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훗날 [[김영삼]]으로 이어져 민주화 이후 우파의 뿌리가 된다. 좌파의 경우 독재정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견해뿐 아니라 사상적 지향조차 정반대였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았다.]에서는 과거 자국을 식민지배했던 일본에 대한 반감 역시 남아 있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격렬한 반일주의자였느냐면, 당장 [[6.25 전쟁]]으로 부산까지 쫓기듯 내려오게 된 상황에서도 '일본군도 UN군에 포함시켜 북한군과 맞서게 하자'는 주장에 "'''[[http://xn--zb0bnwy6egumoslu1g.com/bbs/board.php?bo_table=study&wr_id=10&sca=%EC%9D%B4%EC%8A%B9%EB%A7%8C%EC%97%90+%EB%8C%80%ED%95%9C+%EC%9D%B4%ED%95%B4_18%ED%8E%B8_%EB%8B%AC%EB%9E%98%EA%B0%95&page=1|그랬다간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그날로 총부리를 북한군이 아니라 일본군에 돌려 버리겠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월간조선]]에 인용된 이른바 '왜관성명'으로,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 따르면 부산에서 육군병원에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했는데,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에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이승만이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발언이 저렇게 전해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자이니치) 출신 의용병임이 밝혀졌지만, 당장 북한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끼어 한국 땅에 와 있다는 오해만으로''' 저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니 이승만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508100014#google_vignette|#]] 얄궃게도 이승만은 이런 점에서 '''국가원수로서 한국에서 '반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선례를 제공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흔히 그렇듯 이들은 __반일감정을 퍼뜨림으로서 정치경제적으로 위태롭던 대한민국 내부의 결속을 도모하고자 했다.__ 때문에 민선 독재정권이던 이승만 시절엔 주로 세 번째 이유가, 군부 독재정권이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엔 주로 앞의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하여 반일감정이 강화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