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준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20대에 [[송충]]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왕찬]] 등에게 칭찬을 받아 형주일대에서 명성을 알렸다고 한다.이후 [[유표]]를 섬기면서 강하 지역의 종사가 되는데 부패한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법률을 재정비해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평판이 높았다고 한다. [[유비]]를 섬길 때에는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으나, 계한보신찬 진수의 주석에 따르면 관우와는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게 중요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이후 형주를 [[여몽]]에게 빼앗겼을 때 다른 촉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항복하지만 반준은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손권은 직접 반준의 집을 찾아가나 그래도 반준은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손권은 반준이 매달린 침대를 끌어내었고 반준은 베개를 적시며 통곡하고 있었다. 손권이 이에 직접 반준의 자를 부르며 그를 위로했고 그 배려에 결국 반준은 귀순을 결의한다. '''[[미방]]이나 [[사인(삼국지)|사인]]과는 달리 바로 항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의에서의 [[황충]], [[황권]]처럼 자신이 섬겼던 옛 주인을 위해서 절의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인지 항장이란 이유로 미방을 대차게 깠던 [[우번]]이 반준에게도 똑같이 대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반준이 항복한 다음 해에 [[번주]]가 무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함께 한 때 동료였던 [[습진(삼국지)|습진]] 또한 이에 반응해 번주와 힘을 합쳐 이릉으로 향하는 유비군에 호응한다. 현지 관리가 "1만 명을 맡겨서 독을 파견해야 한다" 손권에게 부탁했지만, 손권은 들어주지않고 반준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반준은, >병사 5천 명만 있으면 생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 손권이 이유를 묻자 >번주는 남양의 옛 백성으로 말씨가 능숙하고 농담 같은 것은 잘합니다만, 실은 변론의 재능은 없습니다. 번주는 옛날에 주의 사람들을 식사에 불렀던 적이 있었는데, 한낮이 되어서도 식사를 끝내지 않고, 10여 명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아침 식사 때 시작한 설전을 한낮까지 질질 끄는 머리 나쁜 놈이니 전쟁도 못할 거라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전쟁 정치 잘하면 상인과 간신배도 잘 하겠네?'와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변론은 결코 말 잘하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백마비마론을 설파한 명가나 합종연횡을 주장하는 종횡가도 있었지만, 조금 어긋난 방향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들을 포함하고서도 근본적으로 학문적 담론은 상인과 간신배의 말솜씨와는 궤가 다르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변론에서 모범 답안은 주제에 대해 적절한 논리를 세운 후, 경전이나 성현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찾고, 옛 역사에서 성공한 예시나 잘못된 예시를 들어 근거를 보강하고, 현실에서 적절한 인물이나 방책을 조합시키는 것으로 변론을 마무리한다. 물론 저 모든 것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긴 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의 논술과 비슷한데, 우리 주변에서 말 잘하는 인물들이 논술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현실 정치는 인물 감식안이라던가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또 달라서 변론만 잘하지 정치는 못하는 인물도 얼마든지 존재하지만, 어쨌든 현실 정치는 잘하는데 변론 못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그 비율이 적다. 형이상학적인 논쟁일 수도 있으나 서양과 달리 중국은 형이상학적 논쟁의 비중이 적고, 현학이 태동하는 시기긴 했지만 화북의 얘기이고, 특히 반준 발언의 맥락상 형이상학일 가능성은 적다. 결국 번주는 시골 사람들 모아 놓고 한 가지의 시사토론조차 질질 끌다가 결론을 못 내는 정도이니 아예 가치가 없는 인물이란 얘기다.] 손권은 웃으며 5천 명을 주니 반준은 출격하여 번주를 쳐부수고 그를 처형했다. 그리고 반준은 그 김에 [[보즐]]과 힘을 합쳐 습진을 죽인다. 그후 [[예현(삼국지)|예현]]이 죽자 예현의 병사를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되고 분위장군, 상천전후에 임명되고 태상으로 봉해진다. 오계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결탁했을 때, 손권은 반준에게 부절을 주어 각 군대를 지휘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그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으며, 법령을 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싸움에서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는 대략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각 이민족들은 쇠약해졌고 모든 곳이 안정되었다. 태상으로 있을 때 반준은 군주에게 아낌없이 쓴소리하는 전형적인 충신의 모습을 보이는데, 배송지주 강표전에서 이르길 손권이 자주 꿩을 사냥하자 반준이 손권에게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해, 만기(萬機)의 직무가 많고, 꿩 사냥은 급한 것이 아니며, 활시위가 끊어지고 화살 끝이 파괴되어도, 모두 해가 될 수 있으니, 특별히 신을 위해서라도 이를 그치고 버리시길 바라옵니다. 라 간언을 하자 반준이 나간뒤 손권은 꿩의 깃으로 꾸민 일산이 본래 있던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무너뜨리고 이후 꿩을 사냥하지 않았다. 조위에서 손오로 귀순한 [[은번]]이라는 사람이 있어 말재주가 뛰어나 자연히 [[주거#s-3]], [[전종]], [[학보#s-1]] 등이 은번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하면서 가까이했다. 반준의 아들인 반저도 은번과 교류하면서 그에게 음식 등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나, 이를 알게 된 반준이 화를 내면서 편지를 통해 아들을 몹시 꾸짖는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반준을 괴이하게 여기였으나, 후에 은번이 위나라에서 보낸 첩자임이 드러나고 은번이 처형되자 반준의 통찰력을 신복하게 된다. 이러하듯 반준은 유표, 유비를 섬긴 항장 출신으로써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촉한의 대장군 [[장완]]의 매형[* 장완의 여동생이 반준의 아내였다.]이라 의심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일례로 보즐의 식객인 무릉태수 [[위정]]이 손권에게 반준이 밀사를 장완에게 보내어 연락을 취하면서 촉나라와 내통해 투항한다는 이야기를 손권에게 하자 손권이 벌컥 화를 내면서 >승명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결코 아니다. 라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으며, 이때 손권이 위정의 상소문을 반준에게 보여주고 위정은 이로 인한 모함죄로 관직에서 파직당한다. 손권이 교사 [[여일]]을 총애할 때, 여일은 손권의 비호만을 믿고 오의 수많은 대신들을 모함하는 등 날뛰었다. 심지어는 승상 고옹이나 상대장군 [[육손]]마저 여일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당에[* 육손은 당시 무창에 없었기에 손을 쓸 수 없었으며, 이때 이미 육손은 손권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육손]] 항목 참고.] 반준은 손권에게 여일의 작태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하지만 이미 손권은 간언으로 정신차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닐 정도로 심각하게 맛이 가 있었다.''' 결국 반준은 극약처방으로 스스로 여일을 살해하고 살인범의 죄를 뒤집어쓸 생각으로 여일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여일이 미리 눈치채고 병가를 쓴 탓에 유야무야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준은 날마다 여일의 죄상을 손권에게 폭로했고 결국 정신을 차린 손권은 여일을 처형하고 반준을 칭찬한다. 그의 가족관계로 아내는 장완의 여동생이고 반저와 반비라는 아들들과 딸이 하나 있었다. 반준이 239년 사망하자 장남 [[반저]](潘翥)[* 자는 문룡(文龍)이다.]가 뒤를 이었지만 요절해 동생 반비가 뒤를 이었다. 반비는 손권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며 딸은 손권의 차남 [[손려]]의 부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