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파국 (문단 편집) === 신라와의 동맹 (522년) === 여기까지 [[크고 아름다운]] 대가야의 장밋빛 미래를 길게 썼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대가야가 이렇게 막강한 영역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5세기에 대가야가 차지한 경남 서북부와 전라도 동부가 한반도에서 비교적 정치 체제의 발달이 느린 곳이었고, 둘째로는 강적 백제와 신라의 직접적 영향권 바깥이었는데다 마침 5세기에 이들이 고구려 때문에 약해져 신경쓸 수도 없는 무주공산의 타이밍을 잘 노린 것이었다. 허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나제동맹]]의 굳건함에 막히고 백제와 신라가 6세기 초부터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상황이 다시 급변하기 시작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뒤 혼란기를 겪다가 [[무령왕]] 재위 무렵부터는 고구려에게 당했던 후유증을 극복하고 장수왕 때까지는 전혀 못하던 반격까지 시작하며, 잃어버린 한강 유역 대신 본격적으로 지금의 전라도 지역 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삼국사기 [[동성왕]] 20년(498년)에 백제가 [[탐라국]]을 공격하기 위해 무진주([[광주광역시]])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통해 이 시기 전라도 서남부 일대에 백제가 다시 그 영향력을 회복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대가야가 차지한 전라도 동부 지역까지 백제가 노리게 되고, 전라도 동부 지역의 쟁탈전에 관한 국내 기록은 없지만 백제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대가야의 영향을 받던 전라 동부 재지 세력의 쇠퇴와 소멸이라는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그 정황과 과정을 대략 파악해볼 수는 있다. 일본서기 기록상 512년([[케이타이 덴노]] 6년)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다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나와있는데, 일본서기 특유의 무조건 일본을 상국으로 갖다붙이는 기질을 빼고 보면 [[무령왕]]이 이끄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얻었다고 이해된다. 이 4현은 지금의 [[여수시|여수]], [[순천]], [[광양]] 지역으로 비정하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사타를 순천의 옛 지명인 사평에, 모루는 광양의 옛 지명인 마로에, 그리고 아래 나올 대사를 하동의 옛 지명인 한다사에 연결시키고, 따라서 상다리와 하다리는 인접지역인 여수로 비정하는 것이다.] 바로 다음 513년 6월조 기사에는 백제와 반파국이 기문(己汶)이라는 곳을 놓고 영역을 다투는 모습이 보이는데, 기문이 지금의 어디인진 여러 설이 있지만 전라북도 동부 지역으로 비정된다.[* 한국측 기록인 삼국유사에서 가야 지명을 딴 [[우륵]] 12곡 가운데 상, 하 기물(奇物)의 기물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역시 일본서기 특유의 백제가 신하국이라는 식의 윤색 빼고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대가야가 (원래 백제 것인) 기문을 '약탈'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백제측이 대외적으로 알려서 백제의 기문지방에 대한 침공 명분을 만들고, 동시에 왜국에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를 보내 선진문물을 전하는 등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했다. 이렇게 호남 동부지역을 획득하게 된 백제는 급기야 반파국의 '전통적인 대외교역 창구'였던[* 왜측에서 과거의 일을 회고한 기사인 일본서기 529년 3월 기사에서 가야왕이 다사진(-=대사, 대사진) 나루가 옛날부터 가야왕이 일본에 [[조공]]하던 중요한 나루터라고 언급한다. 물론 일본서기 특성상 신(臣), 조공 등 윤색이 가해져 있다.] 지금의 [[하동군]]인 대사진을 노리기 시작한다. [[섬진강]] 하구로 이어지는 이곳 [[항구]]까지 잃으면 [[남해]]로의 진출이 아예 막히는 셈이므로[* 다른 방향의 [[안라국]]이나 [[고자국]], [[금관국]] 쪽도 남해바다와 접하지만, 이 쪽 나라들은 출토유물상 반파국의 영향력이 있긴 있는데 좀 미약한 편이었다.]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했고 일본서기 계체8년(514) 3월에 자탄(진주시)과 대사,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 지역까지 걸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봉수대와 저택들을 설치해 백제 및 왜국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 시기 반파국의 남해바다 제해권 다툼을 말하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서기 계체9년(515) 2월 및 4월조의 기사에서 왜국에 갔다가 돌아오던 백제 사신 문귀(文貴)장군을 왜인 모노노베노무라지(物部連)가 호송했는데, 사도도(沙都嶋)라는 섬([[거제도]]로 비정되기도 한다)을 지날 때 '반파인이 사납게 군다'는 말을 듣고, 문귀 장군을 일단 신라 땅에 상륙시킨 후 모노노베노무라지는 수군 500명을 이끌고 곧장 대사강(帶沙江)으로 진격했는데, 반파국이 군대를 보내 공격하자 무서워서 달아나 문모라(汶慕羅)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결국 513년에 일본은 반파국이 가지고 있었던, 위에서 말한 기문과 대사(帶沙, 혹은 滯沙)지방을 백제가 달라고 해서 결국 줬다고 일본서기에 기록했는데 이 역시 일본이 맘대로 가야 땅을 백제에 떼준다는 식의 중간과정의 윤색을 빼면 백제가 반파국 땅 호남 동부(기문)와 하동(대사)을 빼앗으려 했고 일본 측은 이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529년 기사에서도 결국 대사지역을 백제가 차지한 것으로 나온다. 기록문헌이 전하는 것처럼 고고학적으로도 6세기 전반 여수 고락산성, 순천 죽내리 고분군과 성암산성, 광양 칠성리, 남원 초촌리 고분군은 양상이 가야계에서 백제계로 바뀌어가는 모습이 나타나, 백제의 지방 지배력이 이곳으로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중국과 교류할 수 없으니 바다 건너 중국에도 백제가 일방적으로 [[언론플레이]]하는 소식만 들어가서, 521년 '양직공도'에서는 반파를 포함한 가야 각국+기문 등 가야에서 빼앗았던 [[섬진강]] 소국+신라(사라)까지 전부 백제에 부속된 [[속국]]이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반파국은 여기저기서 백제에 밀리기 시작했으나, 가야 입장에선 다행이게도 그나마 아직 고구려가 장수왕 때만큼 효과적이지는 않더라도 백제 북쪽 변경을 줄기차게 침공해주던 시절이라 백제는 이 이상 동쪽으로 침입하려 하진 않았다. 사실 웅진백제는 한강유역 고토수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므로 반대편인 이 쪽 전선에 지나치게 집중할 이유는 적었다. 한편 반대편의 신라도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막아냈고 고구려에 반격에도 나서서, 한때 [[포항시|포항]]까지 밀렸다가도 결국 서서히 수습하고 슬금슬금 북진해서 [[영덕군]]과 [[울진군]]을 지나 [[삼척시]] 지역까지 탈환에 성공하는 등 신라와 백제 양국은 국가의 체급에서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모임 수준에 머무르는 가야를 철저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장수왕 때부터 그동안 백제와 신라를 열심히 위에서 때려서 정신 못 차리게 해주던 전성기 고구려가 쇠퇴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부터 수십년간 안 뚫리는[* 물론 고구려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신라 쪽도 수도 [[서라벌]] 코앞의 [[포항시]]까지 밀어본 적도 있지만, 결국 백제와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건 실패했다.] 백제, 신라 공격에 너무 오랫동안 국력을 낭비해왔고 안에서도 내분이 이어난데다 신흥세력 [[돌궐]]의 침입까지 겹쳤다. 신라는 백제와 달리 반파국의 영역을 직접적으로 침범하진 않았지만, 반파국의 본거지 고령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성주군]], [[경산시]], [[대구광역시]] 지역에 5세기 경부터 [[신라 토기]]가 늘어나는 등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묘하게도, 오늘날 고령군과 성주군 경계선쯤을 기준으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위 성주 용암면에서는 신라식 [[신라토기]], 아래 고령 다산면에서는 대가야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성주 용암면과 고령 다산면은 바로 옆 동네인데도 그렇게 차이가 나서, 당시 국경선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입에도 나름대로 대비했다는 것을 낙동강 서안에 가야의 성을 집중적으로 쌓은 것으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만[* 조효식(2006), "낙동강 중류역 삼국시대 성곽의 분류와 특징", '고문화', 67, 71-92.] 어쨌든 반파국 땅을 더 뺏어가고 더 위협적인 건 백제였기 때문에 그 대신 신라와 친밀하게 지내보기 위해 6세기 초 결혼 동맹을 시도한다.[*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23년 기록에서 백제가 다사진을 빼앗아 가라 왕이 백제와 일본에 원한을 품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결혼 동맹을 했다고 한다.] 신라의 [[법흥왕]] 역시 가야에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몇 년간은 신라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고 두 나라의 왕족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나기도 했다. 524년에는 법흥왕이 남쪽 변경의 땅을 살펴보는데 가야왕이 직접 나가 만나 [[정상회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단 524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법흥왕과 만난 가야왕은 [[반파국]]왕인지 [[금관국]]왕인지 설이 갈린다. 반파국왕이라면 이제 막 결혼 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 확인을 목적으로 한 만남이겠고, 금관국왕이라면 이미 국력 약체화로 궁지에 몰린 금관국왕이 자진 굴복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이로부터 10년도 안 지나 결국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게 되고.] 그러나 일이 꼬여서 결혼 동맹은 결렬되고 오히려 반파국은 후기 가야의 맹주 역할조차 타격을 받고 가야 남부권의 주도권을 잠깐 함안 [[안라국]]이 쥐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5세기 때보다 다소 쇠퇴하게 된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9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 《[[삼국유사]]》에는 이찬 비조부의 딸이라고 적혀 있다.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는 양화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를 그에게 보냈다. >----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522년)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 비조부의 누이로 서술된 위 국내 사서와 다르지만, 이찬(=[[진골]])이면 이미 왕족급 고위귀족일 가능성이 높다.]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나는 즉시 혼인을 허락했으나, 지금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길 바라오" >가라(加羅)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 이뇌왕]가 대답하였다. >"부부로 짝지워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으니 그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 >결국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 >《[[일본서기]]》[[케이타이 덴노|계체]]기 23년(529년) 3월조.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고 가야 각지에 신라인을 분산 배치해서 반파국이 가야의 대표고 모두 반파국의 노선에 따르라는 것을 명확히 하려 했지만[* 여기서 가야 다른 지역을 [[현(행정구역)]]이라 표현한 점에서 고령을 중앙으로, 그 외 지역을 수도에 대응하는 지방으로 판단했으며 영역 국가 수준에 이르렀다고 주보돈 교수는 추정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측(혹은 일본이 인용했을 백제 측), 즉 가야 외부에서 쓴 기록이므로 잘 모르고 현이라 썼을 수도 있겠지만.] 신라 법흥왕은 그 신라인들이 신라식 옷을 입도록 해 오히려 신라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보란듯이 신라옷을 입은 신라인들이 배치되는 이런 상황에서, 반파국의 과한 친신라노선에 반발한 가야계 소국 [[탁순국]]이 먼저 반기를 들었고, 반파국 측이 결례에 분노하자 신라가 파혼하려 하고 반파국은 파혼만큼은 안된다며 빌었지만 결국 신라는 동맹을 거두고 신라에 거리가 가까운 [[금관국]]과 [[탁기탄]] 등 일부 가야 지역이 신라에 흡수되어버리고 반파국의 리더십에 큰 흠이 생기게 되었다. 가까운 합천은 반파국이 제대로 종속시킨 것으로 보이나 남강 유역권은 산청 아래로는 끝끝내 확장하지 못했다. [[안라국]](아라가야)이 함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자국([[고자국|소가야]]) 지역은 [[고성(경상남도)|고성]] 일대에서 여전히 큰 세력 없는 분산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가야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반파국 자체의 한계 때문이거나 주변국인 백제나 신라의 간섭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가야 왕실은 522년에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는 등 백제의 동진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나제동맹]]이 유지되던 터라 뚜렷한 효력도 없었고 이 결혼 동맹조차도 결렬돼버린다. 531년경 [[안라국]]이 [[백제]]의 속국화, 532년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 [[탁순국]]도 어느 시점에 멸망하는 등 가야 소국들이 잇따라 백제와 신라에 굴복하거나 멸망하면서 반파국의 영향력은 낙동강 상류 내륙의 '[[반파국]]과 아이들' 정도로 세력이 축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