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파국 (문단 편집) === 백제와 동맹하다 (541년) === 530년대부터 신라가 무섭게 성장, 금관가야를 멸망시키자 위기를 직감한 대가야는 다시 백제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동맹 관계는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에서 결성되었다. 해당 문서 참고. 다만 이시기 백제 쪽 외교는 [[안라국]]이 주도하고 반파국은 거기에 비교적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안라가 사비회의에 대표자를 2~3명 보내는 데 반해 반파는 상수위(上首位) [[고전해]] 1명만 보낸다. 이 상수위(上首位)라는 직위도 얼마나 높은지 알기는 힘들지만, 추정하자면 안라가 백제에 파견한 2~3명은 하한기(下旱岐) 지위인데, 여기에서 [[한기]]는 왕을 뜻하는 말이라 즉 [[부왕]](副王)급, 왕통 2인자격으로 여겨지며, 다른 가야 소국들은 한기가 직접 백제에 가거나 한기의 아들급을 보냈기 때문에, 상수위가 대략 [[재상]]급이라 해도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왕과 왕자보다는 상수위가 급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지위가 낮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서 우리나라는 여기에 참가는 하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치려 한 것. 그리고 그 이름도 가라(반파국)보다 안라가 앞에 기록되어 있다. 이미 김해 금관국과 창원 탁순국이 신라에 떨어진 이상 창원 서쪽의 다음 타깃으로 유력한 함안 안라국이 더 급하기도 했고, 520년대 친신라정책 실패와 일부 신라 합병이라는 어마어마한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 반파국을 대신해 2인자쯤 되는 안라국을 일단은 외교 리더로 삼고 여러 가야 국가들이 밀어줬던 듯하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자체 국력은 반파국이 거의 항상 안라국보다 강했다.] 그리고 한때 섬진강을 두고 반파국과 백제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것도 이제와서 친백제외교를 반파국이 뻔뻔하게 주도하기 껄그러운 점도 있었다. 그러나 백제도 당연히 호구가 아니니 신라한테서 보호 핑계로 백제군 주둔과 백제 성을 쌓고 가야를 속국으로 만들고 나아가 행정구역으로 흡수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결국 안라국이 백제의 마수를 멈추기 위해 고구려에 백제 공격([[독성산성 전투]])을 사주했다가 고구려는 깨지고 사주했다는 사실까지 백제한테 들키는 사건 이후 얄짤없이 백제의 반 속국 신세로 몇 년간 조용히 지내게 된다. 말기 반파국이 잠시 백제의 영향력에 놓였던 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는데, 고령 고아리 벽화 고분은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며 석실 구조는 전형적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공주 송산리식]]이고, [[도굴]]을 당했긴 하지만 남아 있던 [[토기]]에도 백제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조족문(鳥足文) 토기가 있어 백제의 간섭을 받던 시기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551년, 나제 연합군의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한강 유역 공격]]을 할 때 가야군이 동원되었다.[* 가야(임나)의 [[한성]] 공격 동원 기록은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한다.] 가야의 국익하고는 별 상관없는 방향의 전쟁이었지만 이미 백제의 영향력 아래 놓인 상황이라 별 수 없이 억지로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 [[성왕(백제)|성왕]]의 의견 대립으로 [[나제동맹]]이 깨지자 반파국과 가야제국들은 백제 성왕 편에 붙었다. 사실 [[사비회의]]대로 가야 땅에는 백제군과 백제의 동맹 왜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백제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휘말린 553년 [[관산성 전투]]에 휘말리고 대패해 많은 병사들을 상실해버렸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목을 벤 병사가 29,600여 명이라고 하는데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군이 1만여 명, 왜군이 1천여 명이었다. 나머지는 가야인이라는 건데 수치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라도 많은 가야군이 전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