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굴 (문단 편집) === 한국의 문화재 발굴사 === 한국에서 문화재 발굴이 본격적으로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알려진대로 일제의 관학 고고학자들이 타율성론, 피지배론 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성있는 발굴이 주를 이루었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이뤄진 대부분의 발굴조사는 고분자료를 조사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지표조사나 석조물 현황 조사 및 실측도 있었지만 고분자료에 비해서는 많은 편은 아니다] 다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일제에 의해서 도굴되었다"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적어도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의 제도화된 과정과 원칙 속에서 발굴조사를 했던 것은 맞다.[* 일례로 [[가루베 지온]]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공주 일대의 유적을 허가없이 발굴해서 당시 총독부 소속 고고학자들과 알력이 있기도 했다.] 다만 당시의 고고학적 수준 자체가 당연히 현대의 그것에 비해 모자랐을 뿐이었다. 때문에 신라고분이나 낙랑고분에서 매장주체부의 천정부, 다시말해 뚜껑부터 따고 들어가는 도굴스러운 조사가 꽤 있었다.[* 장법의 차이때문도 영향이 있는데, 횡혈식 석실을 일찍이 채용한 백제 고분에서는 그러한 발굴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도굴된 고분이 많았기 때문에 도굴갱을 따라 발굴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어서 매장주체부의 뚜껑부터 파고내려가는 잘못된 순서의 발굴이 왕왕 있었다.] 그러한 조사들은 유물만 들고 간건 아니고 웬만하면 실측도면을 남기고 보고서에 게재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시도 하였다. 해방이 되고난 다음 한국전쟁의 여파로 고고학은 물론 문화재 발굴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다. 60~70년대를 거치면서 고고학과가 생겨나고 대학 박물관에 의한 발굴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문화재 발굴이 제도적 정비를 거치면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라 황남대총, 백제 무령왕릉의 발굴은 그 계기가 여하하였든 세간의 주목을 끄는 데는 충분히 성공적이었고 80년대부터 대학박물관의 주도 아래에 많은 학술발굴, 구제발굴이 시작되었다. 당시엔 문화재관리국이었던 문화재청 산하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박물관에서도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대학이 숫적으로 더 많았기 때문에 대학 박물관이 주요한 유적들의 발굴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각 지역의 대학들이 지역의 유적들 담당했던 바, 대학박물관의 발굴조사가 시들해진 현 시점에도 몇 대학 박물관들은 여전히 특정 유적을 담당하면서 발굴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여담으로 현재 정년을 약 10여년 정도 남겨둔 교수, 학예사나 사설기관 원장들은 대부분 대학박물관이 주도하던 시절에 학생으로써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많다. 90년대에 들어서는 문화재 관련 보호법들이 강화되고 정비되었으며 사설 문화재조사기관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건설업이 흥기함에 따라서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늘어난 문화재 발굴의 수요를 사설 문화재조사기관들이 담당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제도적인 정비를 거쳐 대학박물관의 발굴조사는 기준이 까다로워 졌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많은 발굴소요들은 사설 조사기관이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설 기관들이 대부분의 구제발굴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학박물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력이나 제원 상의 여유는 물론 전업화된 발굴기관이기 때문에 과학적 조사기법이나 분석방법, 유물 복원까지 아울러 전문적인 발굴보고서를 출간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대학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고있는 곳은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공주대학교 역사박물관]] [[목포대학교]] 박물관 정도 밖에 없으며 그 인원은 학생들로 구성되다보니 인력 및 제원의 한계 상 한 해에 거의 1개 유적 정도만을 담당하고 있다. 이전에 발굴조사를 담당하였던 대학박물관들은 현재는 미간된 보고서 정리 및 유물 전시, 관리, 학술연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각 지역 국박들도 발굴조사를 많이 실시하였으나 현재는 문화재청 산하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및 각 지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대규모의 학술발굴조사를 전담하는 구조로 바뀌었고 국립박물관들은 유물의 수장 및 관리, 유물의 전시와 학예업무, 학술연구 등을 전담하고 있다. 60~70년대만까지는 발굴조사 자체는 체계화된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학술적 성과 누적의 현실적 문제 때문에 누락된 정보들이 많은 편이다. 또한 사진이나 도면 작도의 방식이 통일되지않고 효율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도 질적으로는 좋지 않았다. 그러한 경험의 누적 속에서 80년대 90년대에는 발굴기관은 다르더라도 일련의 정형화된 양식에 맞추어 보고서가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물에 대한 기술에서 나아가 유구에 대한 기록을 점차 소상히 남기기 시작하였고, 유물의 출토위치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사진 등 정밀한 연구분석을 가능케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는 80~90년대에 고고학 각 분야마다의 주요한 유적들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 대학 박물관에 의한 조사다보니 경쟁도 없지않아 있었다.] 00년대 10년대에는 다양한 관점의 연구를 가능케하는 발굴기법 등이 많이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고분발굴에서는 기존의 4분법을 넘어 8분법의 제토방식을 활용하였고, 3D스캔부터 시작하여 실험고고학적인 분석, 토양에 대한 분석 등의 다각적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