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렌시아가 (문단 편집) ===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jpg|width=100%]]}}} || || '''재단의 마법사라 불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 [[1895년]] [[스페인]]의 한 [[어촌]]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옷을 만들던 어머니를 따라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옷을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탓에, 그가 13세가 되던 해 [[마드리드]]에서 카사 토레스 후작 가족의 별장에 놀러간 그는 후작 부인이 입은 드레스를 빌려가 며칠 후 부인에게 똑같이 만든 옷을 내보였다. 카사 토레스 후작부인은 프랑스 장인이 만든 오트 쿠튀르 옷보다 더 꼼꼼한 그의 바느질 솜씨에 감탄하였고, 그를 산 세바스찬에 있는 부티크에 추천했다. 이후 [[부티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뛰어난 [[바느질]] 솜씨와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성격으로 스페인에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으나, [[1937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장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렌시아가' 부티크를 [[1937년]] 8월에 오픈했다. [[17세기]]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벨라스케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첫 번째 파리 컬렉션으로 하루 만에 파리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프랑스 패션에 공헌한 것이 인정되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트쿠튀르]]보다 [[프레타 포르테]]가 패션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꾸뛰리에로서의 자존심을 지닌 발렌시아가는 은퇴를 선언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부분인데, 디자이너들과 재봉사, 패턴사는 별개의 직업이다. 그래서 수석 디자이너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에는 아예 재봉이나 패턴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말로 디자인만 공부하며, 디자인만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는 바느질을 배우긴 하지만 진짜 기술자들에 비하면 실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발렌시아가는 디자인은 물론 재봉 등 옷 제작 전반을 통틀어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가브리엘 샤넬]]이 '발렌시아가만이 진정한 꾸뛰리에'라고 부른 이유가 이 점에 있다.] 이후 4년이 지난 [[1972년]]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