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해 (문단 편집) == 군사 == [include(틀:역대 한국의 군사조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gunsight.jp/bokkai-image01L.jpg|width=100%]]}}}|| 발해의 군사 제도는 명칭과 구조는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구체적으로 각 군사 조직의 역할과 그 운영 원리에 대해서도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발해의 군대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 해석의 차이에 따라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좌웅위(左熊衛), 우웅위(右熊衛), 좌비위(左羆衛), 우비위(右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로 이루어졌다는 10위(十衛)설과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를 각각 하나로 보고 8위제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뉘어졌다. 맹분위(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남북의 좌우위가 각각 남위금병(南衛禁兵), 북위금병(北衛禁兵)의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외에 [[고려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좌우위가 별도로 있다.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씩을 지휘관으로 두었다. 각 위의 장군 아래에는 소장(少將) 1인과 낭장(郎將) 1인, 장사(長史) 1인, 병조참군사(兵曹參軍事) 1인, 교위(校尉) 5인 등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또한,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 조직에 대해선, 촌장인 수령을 지휘관으로 촌락민들을 병사들로 징집하는 군사 조직이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발해의 관제 중 과의도위(果毅都尉), 별장(別將)은 [[당나라군]]에서 나타나는 절충부의 속관이기 때문. 이 절충부는 10위에 배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병력동원력은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많이 떨어졌을 거라 생각되는데, 무왕 시기 대문예가 무왕에게 한 말이라든가, 말기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대 3만+@밖에 동원하지 못한 걸 보면 고구려가 아닌 오히려 백제의 동원력과 비슷해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