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흐 (문단 편집) === [[호라산]]의 요충지 === [[파일:발흐 모스크.jpg]] 10세기 [[사만 왕조]] 대에 세워진 모스크 유적. 발흐 남서쪽 외곽 (옛 외성 밖)에 위치. [[3차 피트나]] 중인 747년에 시작된 [[압바스 왕조]]의 지배 하에서도 불교가 번성했으나 점차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821년 칼리파 [[알 마문]]은 호라을 [[타히르 왕조]]에 맡겼다. 한편 12세기 말의 현지 작가 아부 바크르 압둘라 알-와이즈가 저술한 '발흐의 매력' (파다일-이-발흐)에 의하면 848년 발흐 총독에 봉해진 다부드 (다우드)가 나우샤드 (새 쾌락)라 명명한 호화 궁전의 건설에 열중하는 동안, 그의 카툰 (부인)이 민생과 행정을 도맡았다고 한다. 반세기간 이어진 타히르 조의 지배를 거쳐 870년, 이란계 [[사파르 왕조]]의 야쿱 이븐 알 라이트가 점령하였다. 야쿱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아므르는 압바스 칼리파 [[알 무타디드]]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에 봉해지자, 여세를 몰아 그곳의 또다른 이란계 왕조인 [[사만 왕조]]를 공격하였다. (900년) 하지만 이스마일 사마니가 선수를 쳐 남하하였고, 이어진 발흐 전투에서 아므르는 포로가 된 후 바그다드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바흐람 추빈의 손자이자 발흐 인근 마을 사만의 호족이던 사만 후다[* 그는 발흐를 재건한 아사드 알 카스리를 만난 후 감명받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아들을 아사드로 개명시켰다. 그리고 그 아사드의 네 아들들이 [[알 마문]]에게서 사마르칸트, 헤라트, 타슈켄트, 페르가나 총독에 봉해지며 사만 왕조가 시작된다]에서 비롯된 사만 왕조는 (이스마일 사마니는 그의 증손자) 발흐를 포함한 호라산을 장악하며 이슬람권 동부의 패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0세기의 아랍 지리가 이븐 하우칼은 발흐가 진흙으로 세워진 도시라며 6개의 문을 갖춘 2.5km의 성벽이 두르고 있으며, 시타델 및 대사원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 세기간 이어진 사만 왕조의 지배는 10세기 말엽 사만 왕조가 내전으로 쇠퇴하고, 그 틈에 부상한 튀르크계 [[가즈니 왕조]]가 호라산을 명목상 (994년)에 이어 997년 사만 왕조의 멸망과 함께 실질적으로 장악하며 종식되었다. (997년)[* 994년부터 이미 명목상 봉신인 호라산 총독 명의로 일대 장악, 997년 카라한 조가 사만 조를 멸하자 완전 독립] 비록 사만 왕조를 멸한 [[카라한 칸국]]이 1006년 발흐를 점령했지만 2년 후 [[술탄 마흐무드]]가 회복하였고, 그후 반세기간 가즈니 조에 속하였다. 그러다 [[단다나칸 전투]]에서 가즈니 왕조를 격파하고 호라산의 패권을 잡은 [[셀주크 제국]]이 1059년 발흐를 정복하였다. 다시 반세기가 지나 셀주크 제국의 내전을 틈타 1115년 오우즈 튀르크 유목민이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했으나, [[아흐마드 산자르]]가 격퇴하여 질서를 회복하였다. 산자르의 통치 하에서 발흐를 비롯한 호라산은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12세기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도시 자체는 번영을 이어갔다. 당대의 역사가 알 이드리시는 발흐에 교육 시설이 많고, 인도와 중국을 잇는 무역이 활발하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셀주크 제국의 쇠퇴와 함께 발흐는 혼란을 겪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