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연(전국시대) (문단 편집) == 생애 == [[귀곡자|귀곡선생]]의 밑에서 [[장의]], [[소진(전국시대)|소진]], [[손빈]]과 함께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중 장의, 소진은 처세술을 배웠으며, 손빈과 방연은 병법을 위주로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기상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장의는 소진보다 한 시대 위의 인물이고 손빈과 방연은 장의보다 한 시대 위의 인물이다. 손빈과 방연은 진 효공 때의 인물이며 장의는 효공의 아들인 진 혜문왕 때의 인물이고 소진은 혜문왕의 아들인 진 소양왕 때의 인물이다. 즉 이들을 가르친 귀곡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며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장의, 소진, 손빈, 방연 모두 시기적으로 기원전 300년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생몰년만을 봐도 장의가 기원전 342년, 소진의 사망년도 알 수 없음, 방연이 기원전 342년, 손빈이 기원전 316년이다. 태어난 해가 유일하게 알려진 손빈이 기원전 382년이다. 또한 방연이 손빈과 붙은 [[계릉 전투]]가 기원전 353년이므로 이때의 손빈의 나이는 38세이며 방연의 태어난 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손빈보다 나이가 약간 연상이라 중국 학계에서 40대 초반으로 유추되고 있다. 그리고 계릉 전투가 있었던 353년에 이미 장의와 소진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스승인 귀곡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소진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284년인데 이는 위키피디아 등에 소진의 사망년대가 기원전 284년이라 된 것이 그대로 여과없이 옮겨진 것으로 역사 사료에서 소진의 사망년도는 확인된 바 없다. 제민왕(재위 기원전 300-284)대에 죽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소진의 합종책이 기원전 333년에 이루어지고 당시 합종책에 가담한 국왕 중 [[제민왕]]이 있었으며 제민왕은 기원전 330년에 재임을 시작했고 소진의 합종책이 달성되는 시기가 3년으로 알려졌으므로 소진이 기원전 330년경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추측되고 있으며 이때 최대한 젊게 20대에 활동을 시작했다고 봐도 이미 사망했다고 알려진 기원전 284년은 그는 70대의 노인이었다. 그리고 소진은 사기에서 귀곡자에게 공부를 마치고 나서 백수로 지내던 시기가 있으므로 이걸 감안하면 사망 당시에 80대가 된다. 소진은 제민왕 사망 이전에 사망했다는 사기 기록이 있으므로 소진이 기원전 284년 사망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들 네 명은 동일한 귀곡자라는 스승을 둔 사형제라는 가능성이 크다.] 그중 [[손무]]의 손자(일 가능성이 있는) 손빈과 친해 나이가 많은 방연이 형이 되었다. 그러나 방연은 손자의 후예인 데다가 [[천재]]였던 손빈을 질투했다. 귀곡선생이 통칭 꽃점을 통해 손빈과 방연의 미래를 점쳐준 것으로 유명한데, 방연이 주변을 전부 뒤지고 다니면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져온 반면, 손빈은 방안에 놓여진 꽃을 가져왔다. 방연이 가져온 꽃은 꽃잎이 12개였기에 귀곡선생은 방연에게 12란 숫자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려줬다.[* 어떤 책에서는 세부적인 부분만 다르다. 방연이 처음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 막 발견한 것이 수수한 들풀인 마두령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원대한 꿈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른 꽃을 찾다 못 찾아 마두령을 가져갔다고도 한다. 마두령은 한 번에 열두 송이의 꽃을 피우므로 12년간 부귀를 누릴 것이라 해석되었다. 소설 열국지에서는 더하여 방연은 지혜로워서 남에게 잘 속지는 않겠지만 남을 절대 먼저 속이지 말라며 남을 먼저 속이면 그 행보가 인과응보가 되어 남에게 속아서 죽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본래 [[서자]] 출신으로 출세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던 방연은 노력 끝에 10년 만에 위의 대장군이 되었는데, 이 즈음에 귀곡선생의 권유로 하산한 손빈이 어떻게 [[낙하산]] 좀 안 될까 하고 찾아온다. 동문수학한 친구를 어찌어찌 추천해서 요직에 앉혀놓자 주변 사람들이 그 꼴을 보다못해 그와 손빈의 사이를 [[이간질]]하기에 이르고, 결국 거기에 넘어가 손빈을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의 [[스파이]]로 몰아 빈형(무릎 연골을 파내 [[앉은뱅이]]로 만드는 형벌.)+월형(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제대로 걷는 것 힘들어진다.)+자자형(刺字刑: 이마에 죄목을 문신해 넣는 형벌. 이를 당하고 수치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에 처한 뒤 손빈에겐 "내가 말려서 사형은 못 시키고 이걸로 끝난 거임"이라고 얼버무리고, 손빈은 이를 고맙게 여겨 가문에 전해지던 손자병법을 방연에게 저술해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정말로 제에서 온 세작들이 그를 제로 빼낼 생각을 해]] 손빈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손빈은 광인 흉내를 내며 방연에게 버림받고 제로 탈출, 대장군이 된다.[* 손빈의 고향인 데다 무엇보다도 제는 손빈이 위왕의 노여움에 의해 처벌을 당했기에 이후 분쟁의 소지가 되더라도 위나라로부터 손빈을 보호해주고 지켜줄 수 있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매우 중요한 것인데 당시 위는 전국 칠웅 중에서도 국력이 최강인 패권국이었다. 당시 제나라도 초나라와 같이 위나라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로선 제나라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제나라는 예전부터 위를 탐탁치 않아 했다.'''] 이후 방연은 배운 걸 최대한 활용하여 이름값을 하여 위를 당대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손빈에게 발린 것만 부각되어 그렇지(줄어드는 아궁이[* 감조유적(減竈誘敵)/감조지계(減竈之計)]를 비롯해서) 제를 이긴 적도 많았으며[* 당장 기원전 353년 [[위위구조]] 계책에 당해 [[계릉 전투]]에서 손빈이 이끈 제나라 군대에게 패배한 방연은 그 직후 기세를 타고 자국 영토인 양릉(襄陵)을 포위한 제, 송, 위 연합군을 상대하게 되는데, 한(韓)나라 군대와 연합해 이를 다시 격파하고 제나라 측의 강화를 이끌어냈다.] 무엇보다도 방연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그러다가 대장군이 된 지 10년이 지나 귀곡선생을 떠난지 20년째, 손빈과 방연은 마릉의 전투에서 조우하게 된다. 방연은 앉은뱅이 손빈을 무시하고 방심했고, 후퇴하는 손빈의 제나라 군사들을 쫓아 협곡으로 유인된 끝에 야밤에 어떤 글귀가 적힌 나무를 보게 되었다. 방연은 글을 읽기 위해 불을 켤 것을 명했고 거기에는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고 써 있었다. 이후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방연과 위나라 군사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사살되었다고 전해진다.([[사기(역사책)|사기]] 위세가) 다만 사기의 내용과는 달리 1972년 뒤늦게 발견된 [[손빈병법]]에서는 마릉 전투에서 방연을 사로잡았다고 기술되어 있어 방연이 실제로 전사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그 손빈병법조차 실제로 손빈이 기록한 것인지 진위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