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일영 (문단 편집) == 일생 == [[일제강점기]]인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동문동(현 운전군 가산리)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 1901. 2. 13 ~ 1940. 4. 30)과 어머니 [[이(성씨)|수안 이씨]](遂安 李氏) 이성춘(李成春, 1906. 5. 13 ~ 1973. 12. 8)[* 이은엽(李殷葉)의 딸이다.]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방재윤은 원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方應坤, 1880. 11. 25 ~ 1942. 11. 2)의 차남이었으나 당시 아들이 없었던 방응모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갔으며, 방일영은 동생인 [[방우영]]과 함께 작은할아버지 방응모의 양손자가 됐다. 유년기에 양할아버지인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의정부시]]로 이주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가 [[주오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그 후 1943년 할아버지 방응모의 부름으로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장비서가 되었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자 조선일보 이사로 선출되었고, 이후 [[부산시]]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1953년부터 인쇄인을 지내다 1954년에 대표이사로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1970년 발행분까지 등기상 명예사장은 방응모로 되어 있었다. 1964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인 [[방우영]]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같이 일했으며 1970년에는 사실상 공석이던 사장직까지 주었다. 1975년에는 방일영의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을 매년 10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했다. 현재까지 3백 30여 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규모를 넓혔다. 1978년에는 학교법인 동방문화학원[* [[숭문중학교|숭문중]][[숭문고등학교|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사학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93년에 조선일보 회장직을 동생인 방우영에게 넘기고 고문이 되어 1999년 퇴임 시까지 56년을 조선일보와 보냈다. 그 외에도 1964년 한국신문발행인협회 이사장, 1965년 국제언론인연맹(IPI) 위원, 1969년 아시아신문재단 이사장, 1976년 IPI 한국위원장, 그리고 [[온양 방씨]] 중앙종친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