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지일 (문단 편집) == 생애 == || [youtube(HkiGNC4qWtM)] || [[1911년]] [[5월 21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청나라]] 선교사로 활동하던 아버지 방효원 목사와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선천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정오리교회를 개척하였다. [[숭실대학교|평양 숭실학당]]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1933년]] 졸업과 동시에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한 번 씩 들어봤을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장대현교회의 당시 원로목사가 [[길선주]] 목사였다. 전도사로 재직하면서 [[장로회신학대학교|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재학하며 공부를 병행했고 [[1937년]] [[4월]] 신학교 졸업과 더불어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중화민국 국민정부]] [[산둥성]] 선교사로 파송되어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0년]]부터 17년 간 중화민국 기독교 교단 총회였던 '중화 기독교' 산하 노회와 대회에서 외국인 총간사, 겸임 간사직을 맡았고 [[1945년]] [[칭다오]]의 교민회와 한인학교에서 교장과 여러 직책을 맡으며 지역사회에서 활동하였다. 그 해 [[대한민국]]이 [[광복절|광복]]되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학도병]] 등을 [[미군정]]의 협조를 얻어 귀국시켰다. 그러나 [[1946년]] [[국공내전]]으로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자 암암리에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57년]] [[9월 23일]] 추방 명령을 받아 무려 한 달 간 육로와 배편을 통해 [[홍콩|영국령 홍콩]]을 경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약 20년 동안 활동하던 당시의 중국 사회는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는데 활동 초기의 [[4.12 디화 정변]], [[복건사변]], [[기동사변]], [[2차 양광사변]], [[제2차 상하이 사변]] 등 5번의 사변과 [[난징 대학살]],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어려웠을 때와 위기가 많았다고 한다. 귀국 이듬 해인 [[1958년]] [[6월 12일]]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1964년]] [[3월 22일]] 위임되어 21년 간 교회 뿐만 아니라 교단 산하 기관과 교단 본부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971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56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1년 간 재직하였다. [[1979년]] [[6월 10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82년 대한성서공회 재단이사장과 1983년 한국기독공보사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2014년]] [[10월 10일]] 오전 12시 20분 향년 10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