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통 (문단 편집) == 여담 == * 방통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만 있었더라도 이릉대전[* 그보다 전인 형주 공방전 때 제갈량 방통 둘 중 하나라도 남아 관우를 도와 형주를 빼앗기는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에서 뭔가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이릉대전까지 살았다고 해도 방통은 제갈량보다 겨우 두 살 많았을 뿐이니 이제 겨우 40대 중반밖에 안되는 나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서도 방통의 숙부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이 제갈량의 작은 매형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인척관계이기도 했고 방덕공의 집에 제갈량이 자주 찾아갔고 방덕공이 방통을 아꼈으며 방덕공을 중심으로 제갈량, 방통, 그들을 유비에게 추천한 [[사마휘]]까지 친분들을 다진 정황이 포착되니, 오랜 지기이자 인척, 동료를 잃어버린 셈이 된 제갈량 입장에선 그 아쉬움만큼이나 슬픔이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전장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실제 정사에서 제갈량은 행정능력이 대단하지만 군사적 실무능력은 방통, 법정 등의 인물이 더 뛰어나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았다는 서술과, 방통 특유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인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임기응변도 겸비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기반해볼 때 제갈량-방통 콤비라면 대국적인 군사전략 전반은 제갈량이 맡고 대전략을 전략 단위로 소화하여 책략과 첩보를 통한 적의 교란을 노리는 방통의 결합은 분명 촉한의 북벌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안되었을 리가 없다. 전술면에서 거의 도통한 수준인 법정이야 자연사로 추정되니 어쩔 수 없다지만 방통은 병사가 아니라 전사라는 점에서 하다못해 제갈량만큼만 살아줬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 실제로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급의 인재가 하나 더 있어서 서로 다른 분야를 맡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니 제갈량도 역사에서보다 업무 부담이 줄어들어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란 기대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방통이 계속 살아 제갈량과 함께 이후 촉한의 북벌을 이끌었다면 어땠을지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이릉대전 빼고도 촉한 인재풀이 너무 일찍 사라졌다면서 언급되는 사람들이 주로 세명이 있는데 4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법정과 36세에 전사로 세상을 떠난 방통, 그리고 54세에 과로사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세상을 떠난 제갈량이다. 이들이 1~20년만 더 살아 줬다면 판도가 바뀌었을 거란 말을 하는 삼덕들도 많고, 당장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그렇게 보았다.[* 장수 중에는 46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마초]]가 대표적이다.] >군자와 소인 중에 누가 요절하는지 장수하는지를 보면 세도(世道)가 비색(否塞)한지 통태(通泰)한지를 점칠 수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54세로 그쳤고, [[법효직]](法孝直)은 겨우 45세를 살았으며, 방사원(龐士元)은 가까스로 36세를 살았다. 나이 70을 넘긴 자는 글을 받들고 가서 항복을 빌었던 초주(譙周)였을 뿐이니, 하늘이 과연 한(漢)나라의 덕에 싫증을 낸 것인가. >- 조선, 이유원 * 촉한도 [[강유]], [[요화]], [[장익]], [[동궐]], [[유은]], [[황충]] 등 노장들이 많긴한데 아무래도 진짜 기반 아무것도 없던 유비를 천하의 한축에 올린 3대 책사라고 할 수 있는 제갈량, 방통, 법정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특히나 법정과 제갈량의 이른 죽음[* 사실 제갈량은 50대까지 살았으니 요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은 '''과로'''를 원인으로 보는 현대의 시각이 많아 그들의 과중한 업무를 방통과 나눌 수 있었다면 다들 조금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가능하다. 제갈량은 군정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사마의]]와는 달리 북벌부터 내정까지 치러야할 업무가 지나치게 많았다.[* 유비나 관우, 장비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은 내정과 대전략을 짜는데 집중하고 야전은 유비나 관우, 장비에게 맡기면 되었겠지만 그 셋이 죽고 북벌에서 큰 몫을 해줄 수 있는 황충과 마초마저 죽었기에 제갈량이 맡아야 하는 업무가 엄청나게 과중되었다.] 촉나라의 작은 인프라로 대륙 세력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효율적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스스로를 갈아넣었으며 그렇게 군비를 충실히 확충하면서 결정적인 한 수를 노렸던 제갈량마저도 마속의 대형 실책으로 인해 북벌의 가장 중요한 전력요충지인 가정을 도로 빼앗겨버려 북벌이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만약 제갈량, 방통, 법정이 저들처럼 70을 넘겼다면 각각 250년, 247/248년, 245년까지는 버텨준다는 얘기다. 당장 이들 또래인 사마의가 251년까지 살았다. 만약 제갈량과 방통, 법정 3인방이 저때까지 살았다면 사마의와 위나라 입장에선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제갈량 1명을 상대하기 버거워 [[우주방어|견벽거수하며 수비만 한]] 사마의를 상대로 저 3인방이 촉한의 북벌을 지휘했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해보라. * [[청성잡기]]의 저자인 조선의 선비 성대중은 '제갈량이 (사마의처럼) 살아있었다면 서쪽을 막느라고 정신없어 [[고평릉 사변|어찌 정권을 찬탈하였을 시간]][* 고평릉 사변이 249년의 일이니 확실히 일리있는 얘기다.]이나 있었겠느냐?' 평가한 바가 있는데 괜스레 나온 평가는 아닌 셈이다. 하물며 방통과 법정까지 있었다면, 하다못해 방통이라도 추가되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으며 사마의 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익양대치랑 형주 공방전에서 끝난 게임일지도 모른다. 제갈량이나 방통이 형주를 지키고 번성을 공격하는 관우를 지원했다고 생각해보라. 관우는 정치력이 다소 부족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결국 부하 단속과 후방 유지에 실패해서 패사했는데 그 일들을 제갈량이 맡았으면 훨씬 나았을 가능성이 높다. 미방 같은 자들이 두 마음 먹지 않게 잘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결국 여몽이 형주에 쳐들어올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관우의 부재라는 호재에도 쉽게 쳐들어가지 못해서 [[미방|내응자]]의 도움을 받고도 기습까지 해야했던 그 여몽이 말이다.''' 참고로 245~250년이라면 한참 뒷세대인 [[강유]]가 [[비의]]의 '우리는 제갈승상만 못하다.' 드립을 들으면서 그가 제한을 건 병사 1만만 가지고 농서에서 곽회와 [[하후패]], [[진태]], 등애와 드잡이질을 하며 고군분투하던 시기다.[* 물론 [[비의]]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의가 북벌이 무조건 소극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당시 비의 대신 촉한 군부 상층에서 강유의 상관으로 존재했다면 강유의 고군분투 역시 본 역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촉한 군부의 노익장화야 이미 250년대에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니 여기에 이 나이대의 제갈량, 방통이 들어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 [[삼국지 공명전]]을 플레이해온 [[촉빠]]들은 [[곽가|방통이 살아 있었다면]] 방통의 원군이 맥성을 구원해서[*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조조]]가 맥성을 구원한다.] [[도원종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