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기현 (문단 편집) === 방황했던 신학생 시절 ===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던 배 주교는 문득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신학교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이 [[천주교]]랑 관련이 전혀 없었고 어머니가 [[개신교]] 신자였지만, 배 주교의 신학교 입학을 전혀 막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유명했던 행실로 인해 성당 신자들에게 "네가 [[신부(종교)|신부]]가 되면 개도 신부가 되고, 소도 신부가 된다."(배 주교 교구장 착좌 미사 강론 중) 라거나 "저런 망나니 같은 애가 무슨 신학교냐? 절대 오래 못 있는다."고 할 정도로 걱정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마산교구]] 신학교였던 [[광주가톨릭대학교|대건신학대학]]의 면접에서도 0점에 가까운 교리시험 점수와 학적부에 적혀 있는 4번의 정학을 보고서 면접관이던 교수 신부가 "네가 어떻게,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라고 묻자 "저는 친구를 좋아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쓸쓸할 수 없습니다. [[야훼|하느님]]을 찾아가면 '왜 쓸쓸한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비록 행실과 교리시험 점수에서 낙제점을 받았지만 진심 어린 답변으로 인해 신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분방했던 그에게 엄격한 신학교 생활은 고역이었다고 한다. 특히 새벽 [[미사]] 시간이 고역이었는데 미사에 거의 매일 빠졌다고 전해진다. 담당 사감신부는 당시 마산교구장이었던 [[장병화]] 요셉 주교에게 "신앙심이라는 것은 단 한 톨도 없다."라고 적은 평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학생이었던 배 주교를 아꼈던 장 주교는, 그 평가서를 책상 속에 집어넣고 모른 척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배 주교는 신학교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2학년 1학기 때 신학교를 나오게 된다. 원래는 1학년 2학기 때 퇴학 위기까지 갔는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귀가조치가 내려져서 퇴학은 면했다고 한다.[* 원래 항목은 [[3선 개헌]]으로 되어있었는데, 그러면 [[1969년]]으로 시기에 맞지 않는다.] 자퇴한 것이 아니고 휴학했는데, 이때 어머니가 가장 슬퍼하셨고 아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천주교]]로 [[개종]]까지 하게 된다.[* 배 주교의 어머니 전풍자 모니카 여사는 1973년 [[마산]]에서 개원의 생활을 접고, 소외되고 가난한 [[한센병|한센인]]들이 사는 [[소록도]]에서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1981년 '용신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8년 선종. 참고로 전 여사의 [[세례명]]인 [[모니카]] 성녀는 [[가톨릭]]의 위대한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로, 오랫동안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방황하던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한 어머니로 유명하다.]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 배 주교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래도 다시 신학교에 돌아가고 싶었는지 "신학교에 돌아가려면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공수부대]]병으로 지원하였다. 낙하훈련을 받던 중에 허리와 무릎을 심하게 다쳤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그는 평생 허리통증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11번의 허리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제대 후 신학교에 돌아갔다. 제대 후에는 부상으로 인한 건강상 사유로 휴학을 자주 하였지만 그렇게 행복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