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설(조선) (문단 편집) == 생애 == 배설은 1551년 [[경상도]] [[구미시|선산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명종 때 한성부윤을 지낸 배덕문(裵德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배건(裵楗)과 배즙(裵楫)이 있었다.[* 배즙은 형 배설처럼 조방장으로 수군에 참전했는데, 칠천량 해전 때 전사했다. 답이 없는 전투에 남은 배를 끌고 한산도로 가서 백성을 태우고 탈영한 셈인데 후술할 배설의 [[PTSD]]로 의심되는 행각의 원인 중에는 동생의 죽음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로위(定虜衛)로 복무하다가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 호방(虎榜)에 병과 45위로 급제하여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서 남도에 종군할 때에 조경이 황간·추풍령에서 왜군에 패하자 향병[* 중앙 관군이 아닌 의병이나 지방의 병사]을 규합하고 공을 세웠으며 이후 합천 군수가 된 배설은 [[1592년]] [[9월]]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하였고 이 탓에 아군이 크게 불리해졌다. [[김면]] 항목의 [[김면#s-4.3.2|전투 일지]] 문단으로.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https://ko.wikipedia.org/wiki/%EC%B2%A8%EC%A7%80%EC%A4%91%EC%B6%94%EB%B6%80%EC%82%AC|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선 시대에 있던 관직으로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의 무관이다.]로 임명된 상태였는데, 배설은 "수령으로서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른단 말인가?" 라며 김면의 명령을 거부했다.[* 참고로 당시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9D%98_%ED%92%88%EA%B3%84|조선의 품계]]에 의하면, 군수는 종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었다.]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겼다. 그러자 화가 치민 김면은 [[1593년]] [[2월]],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 군수 배설을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때 김면은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종2품)[*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으로 병사라고도 한다.]로 승진한 뒤였다. 배설은 합천 군수에 임명되었다가 부산 첨사가 되었고, 동래 현령이 되었다가 밀양 부사가 되었고, 선산 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4년]]에 충청 병사로 간 [[원균]]의 후임으로 [[1597년]]에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원균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했다. 이때 배설은 웅천을 급습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꽤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 척을 잃고 말았다. [[칠천량 해전]]의 초반인 14~15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뒤,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들을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배설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7월 16일]] 일본군의 대선단[* 엉겁결에 조선 함대를 공격한 것은 세키부네 60여척이었다. 이후 후발대가 도착하였으나, 배설은 그보다 일찍 전장을 벗어났으므로 실제로 '대선단'을 보지는 못하였다.]이 원균의 주력 부대를 공격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가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여 안전을 도모하였다. 한산도로 물러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 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배설의 함대 외에도 잔여 조선 수군이 각자의 판단으로 뿔뿔이 흩어져 탈출하였으나, 함대 조직 및 명령 체계를 유지한 채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은 배설의 함대 뿐이었다. 배설이 경상 우수사로서 통제사의 명령없이 후퇴하면서 보존한 이 판옥선 12척은 훗날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명량 해전|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을 펼치게 된다. 전선이 없으면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으니 어떤 의미로는 12척의 판옥선을 남김으로써 이순신에게 역전의 기회를 남겨준 셈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배설은 싸움을 회피하고 전력을 남겨 전화위복의 여지를 만든 숨은 공로자였지만 문제는 칠천량 해전 이후 복귀한 이후의 행적이었다. 배설은 이순신이 복귀해 내린 명령에 불복하고 [[탈영]]을 한 것이다. 배설의 탈영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에 관한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려서 이순신이 직접 군선을 찾아갔다. 이때 배설은 [[PTSD]]가 의심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배설이 자꾸 나약한 모습만 보이고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려 잠시 육지에 가겠다고 하자, 이순신은 한마디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장수된 자로서 함부로 먼저 혼낼 수 없다는 논지의 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순신 자신 또한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에는 상선에서 내려서 육지 진영에서 머물고는 했으니, 병을 이유로 배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에는 PTSD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특히 PTSD라는 병은 몇백년 뒤인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베트남전이 지나고 용어가 고정되었다. 한국은 2003년 이후부터 점점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는 병이 되었다. 당연히 조선에서는 이런 병에 대해 알리가 없었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선조 실록]] 22권에서 ‘맹장(猛將) 배설이 수질(水疾, 배멀미)이 있다’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난중일기 8월 21자에도 '배설이 제 종(奴)을 시켜서 자신의 뜻을 밝힌 글인 소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몸조리를 하겠다고 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후 이순신의 심증은 적중하여, 배설은 '''일본군이 점령한 곳을 단신으로 돌파하여 탈영'''했다.[* 당시 이순신이 전장으로 선택한 울돌목은 도주가 불가능한 곳이기에, 죽거나 적을 깨부수거나 두가지 선택 이외에는 불가능했다. 배설의 고향은 경상도 선산(현 [[경상북도]] [[구미시]])이고, 배설이 근무했던 곳인 전라좌수영은 [[전라남도]] [[여수시|여수]]에 있다.] 칠천량 패전 이후 배설에 관한 난중일기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월 21일 양력 9월 2일 <경자> 맑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7월 22일 양력 9월 3일 <신축> 맑다. 아침에 경상 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8월 12일 양력 9월 22일 <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 나절에 [[안위#s-2|거제 현령]]과 [[소계남|발포 만호]]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경상 수사 배설이 '''겁을 내는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르치는데, 조정에서 살피지 못 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8월 17일 양력 9월 27일 <을해> 맑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명량 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판옥선 12척을 말한다.] 장흥의 군량 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가는데, 마침 그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8월 18일 양력 9월 28일 <병자> 맑다.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은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8월 19일 양력 9월 29일 <정축>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교서는 임금의 명령을 담은 글이므로 그 자체에도 예를 갖춰야 하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다. 즉 이때의 배설은 임금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업신 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구절의 바로 다음에 이방과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나오는데, 정황상 경상 우수사였던 배설을 직접 처벌하긴 곤란하므로 그 아랫 사람인 아전들을 대신 처벌한 것으로 보인다.] 8월 27일 양력 10월 7일 <을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8월 28일 양력 10월 8일 <병술> 맑다.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 30일 양력 10월 10일 <무자>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이렇듯 이전의 기록과 이날의 기록을 보면 배설에게 딱히 다른 깊은 뜻이 있던 게 아니라 공포증을 보이고 있어 그냥 냅다 도망칠까 궁리하는 걸 의심했던 것이 이순신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9월 2일 양력 10월 12일 <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 수사 배설이 [[군무이탈|도망쳤다]].|| 8월 12일자 기록에 따르면 배설이 겁내었던 정황이 있었고,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대도륙을 당할 때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철수시킨 것은 배설의 객관적으로 전황을 판단해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겁을 먹고 적전 도주한 것이라고 볼 근거가 된다. 또한 그가 탈영하기까지 기록을 토대로 보면 배설은 전선을 수습해온 공은 있지만 [[명량 해전]]이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거기에 [[칠천량 해전]]에서 얻은 [[PTSD]]까지 겹치면서 그가 탈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고위 지휘관이란 사람이 전시에 탈영을 해버렸으니 열받은 도원수 [[권율]]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고, 배설은 숨어살다가 왜란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인 [[1599년]]에 고향 [[경상도]] [[선산군]]에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배설의 죄목은 전시 탈영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모아 이상한 짓[* [[역모]]를 꾸몄다는 보는 견해도 있으나, 후대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증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 모함설이 성립하려면 배설이 군을 지휘하기 힘들 정도의 병중에 있었다는 의미이므로, 지휘권을 넘기지 않은 것은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다.]을 꾸몄고 조정에서 배설의 부친과 아들 배상충을 붙잡아 인질로 잡은 후[* 배설의 부친과 아들 배상충은 배설이 처형되고 나서 풀려난다.] 배설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한다. 당시 [[선조(조선)|선조]]와 조정이 하는 짓에 아주 정나미가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PTSD]]나 [[공황장애]] 때문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칠천량 해전에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전력을 보전하고 나온 배설이 [[PTSD|명량 해전을 기피한 건 이해가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 불과 한달 전까지 [[칠천량 해전|어이없게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해 함대의 90%가 날아가고 동생은 전사하고 자기도 구사일생을 겪었던]] 배설이 [[이순신|남은 10% 수준의 전력으로 지난번보다 많은 적을 상대하자는 인간]]을 만났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고작 상사 하나가 바뀌었다고 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이순신이 통념을 뛰어넘는 초인이어서 이긴 거지, 당시에도 이순신 빼고[* 난중일기에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라고 기록되어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들어 운이 좋아서 이겼다고 쓴 걸 보면 본인도 승리를 확신했던 것 아니고, ''''이 정도면 승산이 0인 건 아닌데? 잘 하면 될지도 모를듯?'''' 수준이었던 걸로 보인다. 거의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시나리오를 현실화한 거니 유능할 뿐인 일반인인 배설 눈엔 그냥 전멸각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월드컵으로 치면 조별리그에서 경우의 수를 따져서 한 가지 아슬아슬하지만 어쨌든 진출하는 시나리오 발견했을 때 느낌 정도?~~] [[이건 미친 짓이야|조선 수군과 백성들, 조정, 명군, 일본군을 포함한 모두가 이건 절대 못 이긴다고 여기고 있던 상황이라,]] [[명량 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든 수군 장수들은 뒤로 물러나다 이순신이 혼자 일본군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육군 소속이었던 [[안위]]가 처음 부름에 응답한 뒤에야 따라서 돌격했다. 그동안 곁에 동행한 장수들도 이런 지경이었는데, 이전의 참패를 직접 겪었는데다 한 번도 같이 싸워 본 적이 없는 이순신 하나만 믿고 목숨을 건다? 그 누구도 손쉽게 시도할 수 없는 일임이 당연하다. 명량 해전은 학계의 연구가 계속된 현대에도 승리의 요인이 지형도 무엇도 아닌 그저 '''이순신''' 하나로 요약되는 전투다. 즉, 이순신이 불세출의 초인이었고, 배설은 흔한 소시민적인 사람이었을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