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설(조선) (문단 편집) == 유능했던 사람 == 실록과 난중일기의 내용을 보면 유능한 사람이었다. 실록을 보면 배설이 진주 목사로 근무하다가 경상우수사로 발령나서 짐싸고 가려하니 진주 백성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2개월이 넘게 막았다는 일화가 있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실록에만 3차례 논의가 있었다. 칠천량 해전에서도 일본군 함선 8척을 대파시켰고[* 놀랍게도 이게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거둔 거의 유일의 전과다. 그러니까 원균은 단 1척의 배도 못 격파하는 동안 배설은 휘하 12척으로 8척이나 격침시킨 것이었다.] 중과부적으로 이탈할 때도 전선을 수습하여, 병기를 처분하고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전력을 보존했다. 적전도주죄 자체는 명백한 과오지만, 그가 남긴 12척의 함선이라는 공과가 이순신의 손에서 명량 해전이라는 대승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참작해서, 후대에 와서 그가 쌓은 공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원종1등공신(原從一等功臣)[* 정공신 다음 등급의 공신]으로 증직[* 죽은 후 벼슬을 높여줬다.]되어, 1610년(광해군 2년)에 신원(伸寃)[* 억울함이 풀림]되어 가선대부 병조 판서(현 국방부 장관)에 추증되었다. 심지어 사후 추종이 한 번에 그친 게 아니라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 판서에 가중되었다. 전후 적전도주죄로 처형당하는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았음에도 사후에 무공을 인정받아 두 번이나 벼슬이 추존된 아이러니한 인물이 된 것이다. 한 번의 고비만 어떻게든 넘어갔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180도 달라졌을 테지만, 결국 멘탈이 깨져서 탈주해버린 끝에 현재는 '''12척 셔틀'''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다. 분명히 적전도주죄라는 전시상황에서 최악의 과오가 있었음에도 후대에 병조판서로 2번이나 추존된 것을 감안하면 두려움을 마지막으로 1번만 무릅쓰고 필사즉생의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참가하기만 했어도 조선 수군의 구원자라는 불멸의 영예를 얻었을 것이니, 이래저래 비운의 인물이다. [[https://m.blog.naver.com/pictured/221009772090|그야말로 도주,탈출의 달인 그 자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