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수현 (문단 편집) === [[2000년대]] === 고3이였던 2002년 10월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춤을 바탕으로 진로를 정하고 한창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당시 SK의 인기 치어리더였던 고지선이 나온 기사에 치어리더팀 전화번호가 적혀 있길래 전화했다고.] [[SK 와이번스]] 치어리더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당시 SK에는 박기량의 원조급 되는 고지선이 활동하고 있었고, 실제로 배수현도 고지선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숭의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던 시절에도 고지선을 동경했다고.] 뛰어난 춤 실력 덕에 [[SK 와이번스]] 치어리더 오디션에 바로 합격하게 되었고, 인천전문대학 무용과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성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SK 와이번스 치어리더팀에 합격하였으나, 합격하던 무렵 이미 야구 시즌이 종료된 탓에 무대에 설 수 없었고, 대신 서울 SK 나이츠 치어리더팀에 합류하여 프로농구에서 먼저 데뷔했다. 그렇게 2003년 3월 드디어 SK 와이번스 치어리더로 데뷔, 고지선과 함께 뛰며 커리어를 보내게 되었다. 실제로 고지선에게 활동 초반기에 많이 배우고 영향도 받았다고 한다. 2003 시즌 데뷔 2년, 야구 응원 첫 해에 [[200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응원도 해봤다. 물론 흥행 자체가 실패해서 묻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슼유니폼흑역사.jpg|width=100%]] }}} || || 초창기였던 2004년의 모습 || 인지도가 많이 묻혔다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실제 그렇지 않았다. 한 때 배수현의 팬카페에는 250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을 정도로 배수현의 인기가 굉장히 높았다. 시즌이 늘어가면서 배수현의 인기도 많이 올라갔고, 2006년 쯤에 절정을 찍었다. 그 후로는 조금씩 감소했다. 고지선이 SK를 떠나고 그나마 인기가 있었던 치어리더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드디어 [[2007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맛보고, SK 왕조의 4년을 직접 경험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SK가 패배하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잠실야구장 응원석에 가만히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회자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