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중손 (문단 편집) === 진도 용장성 장악 === 삼별초의 새로운 거점이 된 진도는 서남 해안 일대의 요충지이고 [[육지]]와 [[바다]]를 잇는 거점이었다. 진도 삼별초의 거점이 된 용장성 내에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건설된 건물군(왕궁)이 존재했는데 삼별초를 연구한 윤용혁에 따르면 진도 용장성 건물군의 크기와 설계는 성급하게 내려온 상태에서 급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삼별초의 봉기 이전에 이미 진도에 '천도'할 계획을 세우며 용장성 내의 건물을 지었던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지적했다. 1258년 무렵 최씨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무신정권의 수장이 된 [[김준(고려)|김준]]이 원종과는 각을 세우고 당초 몽골과의 화친 조건이었던 출륙환도도 미루면서 '기회만 되면 몽골의 관리를 죽이고 바닷섬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바닷섬이 진도가 아니라 [[제주도]]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미 1260년 1월에 제주부사 나득황에게 제주방호사를 겸하게 하고 2월부터 제주 천도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268년에는 쿠빌라이 칸까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1268년 12월 김준은 원종과 [[임연]]에게 피살되었다). 김준이 강화도에서 다시 옮기려고 한 바닷섬이 진도였으며 용장성의 시설도 그때 정비되었을 것으로 윤용혁은 주장했다.[* 윤용혁, 같은 책, 184~185쪽] 진도를 잃은 고려 조정은 해상으로 운송하던 [[남해]] 지역의 [[조세]]를 거두어 들이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진도를 점거한 삼별초는 8월 19일 여러 주와 군을 침략하고 [[황제]]의 명령이라 사칭하면서 [[전라도]] 안찰사에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거둬들일 것을 독촉하게 하면서 바다 섬으로 옮겨 살게 했다. 9월 2일에는 육지부의 [[나주]]까지 진출했고 나주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남해 지역에서 삼별초의 기세는 그야말로 막강했는데 [[고려사]] 김응덕 열전이나 [[고려사절요]]에는 "적의 세가 성해서 주와 군에서는 소문만 듣고도 진도에 적장(배중손)을 뵈러 가거나 적을 맞아 [[항복]]하기도 했다."고 하고 있을 정도. 9월 4일에 고려의 [[양동무]], [[고여림]][* 고여림은 예전 삼별초 지유였던 인물로 [[탐라]] 성주 일족인데 김준이 임연에게 죽었을 때 삼별초 지유로써 중립을 외치고는 구경만 했고 결국 임연 일파가 승리할 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제주도와 연고가 있는 사람이다 보니 삼별초의 난 당시에 고려 조정의 명으로 제주도로 파견되어 제주도 수비를 전담했으나 막상 삼별초가 제주도에 상륙하자 수탈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은 모두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여기며 환영했고 같은 고씨 일족조차 중립을 선언하고 구경만 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자신이 지휘했던 삼별초에 피살당하고 말았다.]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를 공격했지만 삼별초는 다시 [[장흥군|장흥]]부로 들어 가서 고려 경군 20인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을 사로잡고 재물과 곡식을 약탈한다. 고려 조정은 다시 삼별초의 세력 확장을 막고 배후를 노릴 목적으로 고여림과 [[김수]]에게 각각 7백명과 2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가게 했지만 11월 3일 [[이문경]] 등이 이끄는 삼별초 수군이 제주 명월포에 상륙해 송담천에서 고려군을 쳐서 멸하고 제주도를 장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