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중손 (문단 편집) === 몰락과 이후 === 원종 12년(1271년) 1월 6일에 박천주가 쿠빌라이 칸의 조칙을 가지고 진도에 와서 삼별초를 회유하였지만, 삼별초측은 벽파정에서 맞이하는 척하면서 병선 20척을 보내 몰래 고려군을 쳐서 배 한 척을 뺏고 고려 군사 90인을 죽였으며, 22일에 박천주가 돌아갈 때는 국서에 대해서는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쿠빌라이 칸의 조서에 대해서는 "이 조서는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회답했고, 박천주와 함께 왔던 반행적사 두원외(杜員外)를 억류했다. 봄 2월에는 다시 장흥부 조양현을 침입해 노략질을 해서 전함을 불태우고 방어 도정령 진정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3월에는 합포현을[* 합포는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공격의 전초기지를 설치한 곳이었다.] 공격해 감무를 사로잡거나 동래군을 공격했다. 진도 삼별초의 공세가 이어지던 1270년에서 1271년은 몽골이 한창 일본원정을 준비하면서 고려에 몽골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 원정군이 먹을 곡식을 고려에서 대라, 고려 땅에 둔전을 설치할 테니[* 몽골에서 와서 진도, 탐라의 삼별초 진압에 참전하게 되는 훈둔(忻都, 忽敦) 역시 둔전경략사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몽골에서 고려 땅에 일본원정군의 둔전을 경영하겠다고 나오는 것을 반대했지만(고려인들이 경작하고 정부에서 세금 부과할 수 있는 토지가 그만큼 줄어들게 되니까) 몽골 측은 "우리가 너네들한테서 안 뺏고 알아서 자급자족하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그러니까 우리 농사 지을 소하고 곡식 종자나 빨리 내놔!"라며 밀어붙였다. 그나마 소와 곡식 종자를 거두어 가면서 비단으로 값을 매겨주기는 했다마는...] 둔전 경영에 필요한 소와 곡식 종자를 고려에서 내라 등의 요구를 떠넘기고 있었고, 고려에서는 비축해 두었던 것은 육지에 나오면서 삼별초에 다 빼앗겼고 그나마 남은 것도 지금 주둔하는 몽골군에게 대고 있으며 충청, 전라 지역은 삼별초 진압 때문에 소를 징발할 수가 없다고 호소하면서 몽골로 잡혀간 고려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원종 자신이 직접 입조해 이를 호소할 계획을 세웠다. 근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를 전전하며 원나라와 고려에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에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삼별초는 '''1271년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고려첩장불심조조'라고 해서 일본 [[다자이후]] 측 관리들이 "'''이번에 새로 온 국서가 전에 고려에서 받은 국서와는 내용 취지가 전혀 다르네? 이거 뭐지?'''" 하고 의아해한 부분만을 추려 교토 조정에 보낸 것인데, 대체로 몽골을 칭찬하던 전의 국서와는 달리 몽골을 엄청나게 욕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몽골에 맞서서 함께 싸우자며 군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고,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낼 사람은 시대상황상 삼별초밖에 없다는 것. [[2001년]] 일본 [[NHK]] 대하사극 <[[호조 도키무네]]>에도 이 내용이 등장하는데, 작중 나레이션으로 "이때 고려 본토에서 삼별초가 봉기해서 몽골에 맞서 항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에 구원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막부의 관리들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고 소개하면서, 국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401&tabId=01&levelId=hm_051_0070|#]] 일본과 경계가 가깝던 경상도 지역에서 몽골에 의한 피해가 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월에 경상도 지역에서 밀성군에서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등이 밀성군에서 사람들을 모아 장차 진도에 호응하려다 발각되어 실패하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개경에서 관노 숭경, 공덕 등이 무리를 모아 몽골의 다루가치와 고려인 관리를 죽이고 진도로 투항하고자 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2월 7일에도 착량(손돌목)을 지키던 몽골군이 대부도에서 주민들을 약탈하다가 개경에서 숭경, 공덕 등의 모반 소식을 들은 당성 사람 홍택, 홍군비 등 대부도 주민이 몽골인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수주부사 안열에게 진압되기도 했다.[* 봉기가 일어난 곳은 경상도와 개경 그리고 경기 지역 서해안 입보처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그 성격상 반몽, 반개경정부 그리고 진도에의 호응을 전제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12세기 이래 지방에 만연했던 민중봉기의 맥락을 계승한 측면이 있다고(윤용혁, 같은 책, 187~188쪽)] 개경에서 일어난 숭경, 공덕의 모반은 2월 5일에 몽골로 간 상장군 정자여에 의해 쿠빌라이 칸에게 보고 되었는데, 쿠빌라이 칸은 모반 소식을 전해 듣고 '''고려 측의 모든 건의를 모두 거절한다'''고 통보해 버렸다. 원종의 입조 계획도 "왕이 있어도 그 모양인데 왕이 없으면 너네 나라 끝장난다. 나한테 올 시간에 너네 나라 반란군이나 진압해라."라는 쿠빌라이 칸의 거절로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삼별초는 몽골과의 교섭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 중서성(中書省) 신하가 말하기를, > “고려의 반역한 신하 배중손이 간청하기를 ‘'''모든 군대가 퇴각한 후에야 내부(內附)하겠다고 하였는데 훈둔(忻都)[* 한자를 그대로 읽어 흔도라고 하기도 한다.]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이제 전라도를 얻어 거주하면서 조정에 직접 예속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그가 말을 꾸며대며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 ---- > 원사 본기 지원 8년(1271년) 3월 16일 기묘 여름 4월 8일에 삼별초는 다시 금주[* 지금의 김해시.]에 침입한 후에 산성을 불태우고 노략질하고 돌아간 뒤에도 삼별초의 배중손이 다시 몽골의 훈둔에게 교섭을 요청했음이 원사와 고려사에서 보인다. > 고려의 봉주경략사 훈둔이 > "반신 배중손이 사명을 지체시키면서 지세의 험함을 믿고 복속하지 않으니, 간청하건대 쿠룸시, 왕국창과 함께 길을 나누어 가서 치고자 합니다." > 하므로 이를 따랐다. > ---- > 원사 지원 8년(1271년) 4월 9일 임인 > 추토사 김방경이 보고하였다. > "진도의 적이 훈둔에게 '은밀하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관인께서는 잠깐 이 섬에 들러 주십시오.' 하였는데 훈둔은 '내가 황명도 없이 어찌 감히 그 섬에 들어 가겠는가?'라 하였고, 적이 다시 들러달라 청하며 술과 안주를 대접하니 훈둔이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 ---- > 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년) 4월 14일 정미 원사에는 배중손이 훈둔에게 몽골군이 철수하고 나면 내부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훈둔이 들어주지 않자 전라도 지역을 얻어서 몽골 조정에 직접 내속하겠다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고려사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삼별초 정부와 몽골 주둔군 사이의 교섭 자체는 실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박천주가 가져온 쿠빌라이의 회유 조서에 대해서 "우리한테 보낸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태도가 바뀐 것으로 다소 의아한 부분. 일본의 무라이 쇼스케는 몽골과의 협상 과정에서 보여주는 배중손의 이 모호한 태도를 진도가 함락되기 전에 보여주는 이 모호한 태도를 두고 배중손은 삼별초 안에서도 투철한 반몽 세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기회주의적인 온건 '동요분자'의 대표 인물이었으며, 이는 삼별초 자체의 내분을 암시하고 배중손은 진도 함락 때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숙청'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윤용혁은 원사에서 쿠빌라이가 배중손의 내부 제안을 "쓸데없이 시간이나 끌려는 헛소리다"라고 일축했던 것이나 연합군의 진도 대공세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훈둔이 "반신 배중손이 사신을 억류하고 지세의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는다"고 전한 것, 배중손이 이러한 뜻을 전했다고 하는 시점이 이미 진도 대공세를 불과 한 달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고 김방경이 배중손과 훈둔 사이의 접촉을 알아낼 정도로 개경측이 진도의 내부 사정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점 등을 들어서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하면서도 진도 삼별초 내부에 다양한 입장차이가 실재했으며 이것이 내부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윤용혁, 같은 책, 197~198쪽] 4월 19일, 몽골에서 영녕공 왕준의 아들 왕희, 왕옹 두 사람이 4백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를 치러 왔는데, 21일에 몽골은 "더위와 장마 오기 전에 몽골 병사들이 고려에 도착하기 힘들것 같은데 너네가 먼저 6천 명쯤 뽑아서 진도를 공격해라. 일찍 끝나면 왕도 백성도 좋은 일 아니냐?"라며 군사 6천 명에 추가로 전함 140척의 징발을 다시금 고려에 요구해 왔다. 5월 1일에 몽골의 홍다구와 훈둔, 고려의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했다. 삼별초는 섬의 북쪽 절벽에 함선을 포열해 놓고 있었는데, 몽골의 경략사 사추가 더위 때문에 바다가 습하고 활이 느슨해진다면서 군을 셋으로 나누어 깃발을 잔뜩 내걸어 병사로 위장하고 자신은 군을 움직여 진도로 가면서 몽골 본국에 화창, 화포 등의 화약 무기를 요청했다. 당시의 여몽연합군의 공격 루트는 고려사 김방경열전에 보면 이러하다. * 고려의 김방경, 몽골의 훈둔이 중군 - 벽파정 공격 * 영녕공의 아들 왕희, 왕옹 및 홍다구가 좌군 - 장항 공격 *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가 우군 - 진도 동면 공격 고려사에는 삼별초가 벽파정의 중군을 공격하고자 나서자 좌군의 홍다구가 진도의 삼별초 본진으로 들어 가는데 성공, 먼저 불을 지르며 협공했다고 하는데, 불을 질렀다는 기록은 화약 무기의 사용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는 무너져 공격 방향을 우군으로 돌렸고, 우군이 놀라 중군 쪽으로 합류하려는 것을 다시 배 두 척을 빼앗고 그들을 죽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분격에 삼별초는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고, 무너지는 적을 추격해 남녀 1만 명과 전함 수십 척을 노획하고 진도에서 쌀 4천 섬과 재화, 보물, 병장기를 얻어 수도로 보내고 양민은 생업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때 진도에 있다가 포로로 잡힌 자들 가운데는 강화도에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진도에서 살던 주민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그런 것 없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해 잡아가는 바람에 진도는 거의 빈 섬이 되어, 고려 조정에서는 이후 몇 번에 걸쳐 이들의 송환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배중손은 이후 기록에 나오지 않는데, 이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승화후 부자도 홍다구에게 죽었다. 용장성이 함락될 때 삼별초는 2대로 나누어 각기 의신포(금갑포?)와 남도포로 향해 퇴각하였는데, 배중손은 남도포 쪽으로 향하다 남도석성에서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다만 남도성이나 금갑진성은 조선 초에 왜구를 막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윤용혁, 같은 책, 195~196쪽] 진도가 무너진 뒤 의신포(금갑포라고도) 방면으로 달아난 김통정이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탐라)로 들어갔다. 이때 삼별초 중에서 일부는 남해현을 점거하고 연해 지방을 공격해 노략질하다가, 김방경 등의 공격으로 인해 본대가 제주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배 80여 척을 이끌고 따라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