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백년전쟁 133714532.jpg|width=100%]]}}}|| '''백년전쟁'''([[百]][[年]][[戰]][[爭]])은 중세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라벤나 함락|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이교도 대군세|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근대까지도 이어진 양국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내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같은 시기 동유럽에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 1600만 이상의 강대국이었고[* 1328년 프랑스 왕실 재무부는 과세 대상 가구 조사에서 세금이 면제된 대귀족과 왕족들의 영지를 제외하고 2만 4천 개 교구의 247만 가구를 집계했다], 잉글랜드는 인구가 프랑스의 절반도 안되는 500만 정도인 데다 한때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군과 승리할 수 있었는데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랭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이름은 백년 전쟁이지만 양국이 116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지속해서 계속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양국이 1337년에 처음 선전포고를 하고나서 116년 뒤에야 협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언했기 때문에 백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때문에 실제로는 중간에 몇 차례 휴전이 있었다.[* 전쟁은 당연하지만 두개 이상의 국가들 중 어느 한 쪽이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설령 공격자가 나중에 뜻을 바꾸어서 공격 의사를 거두더라도 방어자 또한 여기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결코 종전이 될 수 없다. 이해가 어렵다면 깡패가 시민을 일방적으로 폭행한 다음 폭행이 끝나고 나서 "나는 너랑 '싸움'을 할 생각 없음"이라고 선언하면 시민이 깡패를 폭행죄로 고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면 된다. 만약 시민이 그 자리에서 깡패의 일방적인 공격 포기 선언에 동의를 해버리면 나중에 뒤늦게 마음을 바꾸어서 깡패를 폭행죄로 고소를 하려고 해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해서 고소를 할 수 없지만, 시민이 깡패의 일방적인 공격 포기 선언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아직 '싸움'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므로 시민은 이를 근거로 깡패를 폭행죄로 고소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국경선으로 취급되는 경계선의 이름이 [[휴전선]]인 이유도 이와 같은데, [[6.25 전쟁]]은 공산 진영 국가들과 자유 진영 국가들이 더는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공식적인 협상을 완료했으나 제일 중요한 당사국들인 대한민국과 북한이 이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은 전쟁이 현재진행형이며 따라서 양국의 경계선의 이름이 휴전선인 것이다. 이 때문에 종종 남북협상을 위해 양국 정상들이 모여서 '종전선언을 할 수 있도록 하자'고 협상은 하지만 말 그대로 '언젠간 선언하자'급의 결론만 내리고 끝나기 때문에 결국엔 종전선언을 하지 못하고 아직도 전쟁이 현재진행형이다.] 시작은 보통 1337년 4월 아키텐 공작위 몰수 선언 직후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태자 에드워드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잉글랜드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 3기와 4기를 가른다.[* 이는 중간기를 길게 잡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1369년부터 1389년까지를 프랑스가 영토를 탈환하는 2기, 이후 잠시 휴전기를 두었다가 1415년부터 1429년을 잉글랜드 재우세의 3기로 보고 있고(즉, 사실상 다섯 국면의 구분이다), Osprey 출판사는 헨리 4세의 즉위년인 1399년을 기준으로 2기와 3기를 가르고 있으나 이는 잉글랜드적인 기준에 가깝다.] 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96년[* 아르들 회의가 있던 해.]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http://blog.gorekun.com/1347|#]] 뒤에 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 전쟁(1701~1815)[* [[루이 14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서 쫓겨날 때까지 114년의 기간을 자랑한다.]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