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백년전쟁/제1기 (1337-1360)#s-3|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5~1348) === [[파일:Prise_caen_1346.jpg |width=600]] >그는 노르망디 원정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며 이렇게 설득했다. "노르망디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곳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정복할 수 있으리란 사실에 저의 목을 걸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적이 없고 프랑스의 모든 기사들은 왕세자를 따라 에귀용을 점령하러 떠났습니다. 폐하, 이 지방은 성벽이 없는 큰 도시들로 가득하고 그곳에서 폐하의 군사들은 앞으로 20년은 봉급을 받지 않아도 족할 부귀를 누릴 것입니다."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휴전이 끝나자 더비 백작 헨리가 이끄는 분견대가 보르도에 상륙해 남부 프랑스의 요충지들을 기습한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주력군도 슬로이스에서 출항하지만 비밀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잉글랜드로 포류하고 원정은 취소된다. 그러나 더비 백작은 적은 수의 군사들만으로 베르주라크와 오베로슈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남부 프랑스 야전군이 해산된다. 왕세자 장이 북부 프랑스에서 소집된 대규모 야전군을 이끌고 다시 내려와 남부 전선의 요충지 에귀용을 포위한다. 그 사이 에드워드 3세는 주력군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파리로 진격한다. 그러나 파리 시 앞에서마저 필리프 6세가 전투를 회피하자 에드워드 3세는 동맹인 플랑드르 국경으로 후퇴한다. 잉글랜드군은 기적적으로 솜 강의 저지선을 돌파하지만 플랑드르군의 도착이 예정보다 늦어져 프랑스 영토 안에 고립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 6세는 강행군으로 잉글랜드군을 추격해 따라잡지만 크레시 전투에서 대패한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와해된 사이 잉글랜드군이 플랑드르 국경 근처의 요충지에 위치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포위하고 11개월만에 점령한다. 북부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에서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와 블루아 파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크레시 전투의 충격에서 막 벗어난 프랑스에게도 반격의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때마침 서유럽에 도달한 흑사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휴전을 체결한다. 한편 플랑드르에서는 시민 정부가 내분 끝에 해체되고 백작의 통치가 다시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