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백년전쟁/제2기 (1360-1389)#s-1|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5) === [[파일:The Tard-Venus pillage Grammont in 1362.jpg |width=650]] >"우리는 들과 강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조약의 내용에 의하면 모든 중장병과 자유부대는 전쟁 기간 동안 점령한 성과 요새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대장 아래 종군하는 수많은 가난한 부대원들이 한데 뭉쳤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왕들은 전쟁을 관뒀지만, 우리는 전쟁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우리는 부르고뉴로 행군했습니다."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왕들은 전쟁을 끝냈지만 군인들은 전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싸우던 직업군인들은 브레티니 조약 이후 용병이나 도적이 되어 프랑스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일부는 교황에게 고용되어 이탈리아로 향한다. 프랑스는 클레르몽 조약을 체결해 용병들을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킨다. 그러나 많은 용병들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도적단을 진압한다는 명분과 장 2세의 개혁을 기반으로 왕세자 샤를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 체제를 확립한다. 얼마 뒤 장 2세가 런던에서 병사한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코슈렐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렇게 부르고뉴 공령을 차지하고 프랑스 왕위를 찬탈하겠다는 카를로스 2세의 야심은 좌절된다. 승전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샤를 5세가 랭스에서 즉위한다. 한편 오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샤를 드 블루아가 전사하면서 브르타뉴 내전은 몽포르파의 승리로 끝난다. 프랑스는 용병 도적단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지휘하에 또다시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킨다. 카스티야 원정대는 아비뇽을 포위하여 교황으로부터 면죄와 보호비를 받아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