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백년전쟁/장기 휴전 (1389-1415)#s-3|돌아온 해적 시대]] (1403~1407) === [[파일:pero nino 1405.jpg |width=350]] >우리 방패병들과 쇠뇌수들이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잉글랜드의 중장병들이 진군해왔다. 이 중장병들은 전열 가운데로 들어와서 페로 니뇨의 부대 앞에 이르렀다. 페로 니뇨는 이에 맞서 중장병들을 진군시켰다. >많은 강한 창 찌르기가 가해졌고 그 결과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부는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창을 버리면서 중장병들은 도끼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혼전이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면갑이 떨어져 나가거나 팔 갑옷과 다리 갑옷이 벗겨져 나갔고, 다른 이들은 도끼와 검을 손에서 놓쳤다. 어떤 이들은 서로 맞붙어 드잡이질했고, 다른 이들은 단검을 손에 쥐었다. 어떤 이들은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많은 곳에서 피가 넘치게 흘렀다. >----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의 연대기 헨리 4세의 찬탈과 오를레앙 파벌의 부상으로 양국 관계가 냉각되면서 영국해협에서 사략선의 활동이 재개된다. 부르고뉴 공작은 해상무역에 의존하는 플랑드르와 브르타뉴 도시들의 압력에 굴복해 잉글랜드와 협상을 시작한다.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파를 제압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양국의 관계는 협상 이전보다도 험악해진다. 프랑스의 대규모 사략 함대가 다시 잉글랜드 상선을 약탈하고 해안 마을을 습격해서 불태우기 시작한다. 다트머스 인근 해안에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이 상륙하지만 수비대의 반격에 참패한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공작이 병사하면서 부르고뉴파는 모든 권력을 잃는다. 오를레앙파는 [[오와인 글린두르]]와 동맹을 맺고 웨일즈에 지원군을 보내지만 해상에서의 잉글랜드군의 우위와 악천후 때문에 실패한다. 그 대신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습격하지만 또다시 수비대에게 참패한다. 이어진 잉글랜드 함대의 반격에 플랑드르와 북부 프랑스의 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오를레앙 공작의 군사적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신임 부르고뉴 공작과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4면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잉글랜드 정부 역시 파산 직전에 몰리지만 웨일즈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고 퍼시 가문의 2차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면서 숨통이 트인다. 부르고뉴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오를레앙 파벌과 대치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시와 북부 프랑스 도시 세력의 지지를 받지만 정부의 요직은 오를레앙파에 의해 장악돼 있다. 결국 양측 모두 상대를 제압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평화 조약을 맺는다. 한편 잉글랜드군이 해상에서 우위를 점한 결과 오를레앙파는 보르도 점령에 실패한다. 웨일즈에 상륙한 프랑스 지원군도 퍼시 가문의 반란이 진압되고 웨일즈 반란군의 기세가 꺾이자 퇴각한다.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선의 요충지인 브랑돔을 점령한다. 파산 직전인 잉글랜드 정부는 결국 지원군을 보내지 못한다. 가스코뉴인들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많은 요새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오를레앙 공작은 대군을 소집해 직접 보르도를 공격한다.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북부 전선을 담당한 부르고뉴 공작 몫의 지원금마저 강탈해서 원정을 계속하지만 생쥘리앵 해전에서 참패하고 회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